(이어서)
삼성에서 진행한 그룹사 연수에서는 딱히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특수 직군들과 같이 연수를 받았는데, 특히 이번 연수에서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비율이 높았다. 개발자들과 팀 프로젝트를 하는 일은 마치 컴퓨터 소스 코드를 다루는 일처럼 일목요연하게 정해진 목표와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높은 성과를 얻기는 했지만 연수원에서 뭔가 흥미 있고 재미있는 사람들과 만나 연수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무미건조한 동기들이라고 투덜댔다. 우리 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이미 연수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남친, 여친이 있었고, 중고 신입이나 석박사 비율도 높아서 연수원 하면 떠올리는 그런 열정적이고 활기찬 분위기와는 약간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동물의 왕국'을 생각했던 솔로들은 자연히 연수 이후 배정될 계열사 배치를 꿈꿀 수밖에 없었다. 연수가 후반부로 갈수록 실제 현업에서 온 지도 선배들과 많이 친해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어색했던 지도선배와의 대화 시간에도 점점 진지하고 솔직한 질문과 답변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자주 나왔던 질문은 사내 분위기와 남녀 비율이었다. 다들 표면적으로는 업무 강도를 가늠해 사업부 선택에 참고하고 싶다며 물어본 문항이었지만 거기에서도 솔로들의 사내연애를 향한 진심이 약간은 담겨있는, 그런 질문이었다.
전통적으로 반도체 공장에서는 설비를 담당하여 유지 보수하는 엔지니어 업무는 남자가 맡고, 그 설비마다 반도체가 새겨지는 원판인 웨이퍼를 옮기거나 생산 일정에 맞춰 관리하는 오퍼레이터 업무는 여자가 맡았다고 한다. 아마 기계를 다루는데 익숙한 남자가 엔지니어를 하고, 꼼꼼하게 일정을 관리하는데 잘 맞는 여자가 오퍼레이터를 맡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비록 업무는 다르지만 클린 룸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방진복이라는 불편한 옷을 입고 일을 하다 보니 동질감도 생겼을 것이다. 게다가 남녀 간 맡은 업무가 다른 점이 어쩔 때 보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서로 자신의 업무를 위해 티격태격하다 보니, 고운 정보다 더 무섭다는 미운 정이 쌓여 어느새 연애하고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 연애하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 어엿한 대학 나와 대한민국에서 제일 크다는 회사에 취업하여 나라 살림에 이바지한다는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다고 하니 스펙에서는 밀릴 것이 없었다. 이 정도면 소개해줘도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다른 회사 다니는 자기 친구들과 소개팅을 주선해준다는 이야기가 동기들 사이에서 많이 들렸다. 다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반도체 공장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들은 공돌이 공순이들의 애환을 사랑의 부족으로 받아들이고는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