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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훈 Oct 13. 2019

호형호제

며칠 전 S 직군 소프트웨어 개발자 동기들과 저녁을 먹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조/기술팀 사람들은 조금만 친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형, 언니 등 편한 호칭을 쓴다며 신기하기도 하고,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말을 했다. 나도 삼성에 막 이직한 다음 기술팀 사람들과 일하며 적응이 잘 안되었던 부분이었기에 공감도 되고, 잊어버리기 전에 이 주제에 대해 얼른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포 H사에서 일할 때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OOO 씨, 또는 OOO 사원님이 기본적인 호칭이었다. 상무님이나 팀장님도 나이에 상관없이 업무적으로 부를 때에는 나를 저렇게 부르셨고, 나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었다. 가끔 가다가 외부 업체를 만나거나, 옆 부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호칭이 약간 껄끄러울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적당히 한 단계 높게 찍어서 OO 대리님, OO 과장님으로 일단 부르고는 했다.



삼성에서는 업무상으로 한두 번만 만나도 금세 반말로 부르고는 했다. 경험적으로는 주로 설비 엔지니어 직군에서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은 대졸도 너무 흔해져 별로 의미가 없지만 예전에는 엔지니어 직군, 특히 설비 엔지니어 직군은 고졸이나 전문대졸 인력이 주로 담당했다고 한다. 가끔 술자리에서 선배들의 신입사원 이야기를 들어보면, 군대는커녕 고등학교만 갓 졸업하고 지방에서 올라와 돈 벌겠다고 공장에서 3교대로 고생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럴 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형, 동생 하며 회사생활의 어려움을 버텨내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처음에는 일방적인 호형호제가 굉장히 어색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당황스러웠는데, 이제는 적당히 이용하는 방법도 배우게 되었다. 업무적인 요청을 해야 할 때나 완곡히 거절해야 할 경우에는 특히 '동생'의 위치를 강조하면 못 이기는 척 도와주실 때가 많아 잘 써먹고 있다. 반대로 '형'인데 한 번만 봐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할 때도 뿌리치기가 힘들다. 한국식 서열 문화의 장단점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호형호제의 병폐를 줄여보고자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다. 삼성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삼성전자는 2017년부터 직급이 CL(Career Level) 4단계로 통폐합되고, 공식적으로는 전 사원이 OOO 님으로 호칭 통일화되었다. 그런데 웃긴 건, 메신저 조직도 상에는 CL이 몇 단계인지 친절하게 표시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아도 CL4(부장급)에게 신입사원이 과연 OOO 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더 웃긴 건, 호칭 수평화 대상에 임원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원급들만 호칭 없이 서로 OOO 님이라고 부르고, 임원은 예전과 같이 OOO 상무님, OOO 전무님이라고 부른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호칭 파괴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다가 한국에서 가장 먼저 호칭 파괴를 시작한 CJ그룹의 이야기를 보았는데, 거기는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공식 석상에서 이재현 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는 삼성도 정말로 호칭 파괴 정책을 적용했다면 사원들 사이에서 회장, 부회장을 호칭할 때 이건희 님, 이재용 님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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