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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k Glove Jul 22. 2019

우선 살부터 빼고 오겠습니다

3. Beauty day in my bathroom

푹신한 침대 위로 폭 안기듯이 쓰러졌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숙취로 보내고, 비몽사몽한채로 또다시 새벽 비행기를 타고 현실로 돌아왔다.

운동화는 거실에 벗어던졌고 캐리어는 방 구석에 던져놓았다. 지금은 푹 잠들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않는다. 그대로 낮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창문 밖으로 누군가가 전화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어가 간간히 섞여들리는 걸 보니 지난번에 길을 잃고 헤메던 그 청년인가보다. 잠 자긴 글렀군. 원체 잠귀가 밝아 이런식의 방해를 받으면 오던 잠도 깨버린다.


아껴두었던 러쉬의 배스밤을 꺼내들고 욕실로 향했다. 오렌지 향기와 온수로 이 피곤함을 씻어내고싶다. 욕조에 온수를 세차게 틀고 노란색 배스밤을 욕조 안으로 던졌다.

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말이 아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간만의 음주에 시위라도 하듯 뺨에는 붉게 성난 뾰루지가 났고, 덜지워진 아이라이너인지 다크서클인지 모를 눈 아래가 까맣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건 툭 튀어나온 윗배와 아랫배. 뉴욕에서 식욕을 참지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반신욕이라도 해주어야지. 몸과 마음을 재정비 하는 차원에서 빗자루같은 머리카락에 딥 컨디셔닝 크림을 잔뜩 발라주고 비닐 캡을 썼다. 클렌저로 얼굴을 깨끗이 씻어준뒤 욕조에 들어가 반신욕을 즐기기 시작했다. 몸이 녹는것 같아. 행복하다.

옛날 사람들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목욕재계'를 하지않았는가. 이제 뉴욕에서 일어난 폭음과 폭주를 깨끗이 씻어내고 다시 태어나는 거다. 날씬한 여자로. M사이즈를 입던 그 리즈시절로!

힐러리 여사도 대학생 시절 일주일에 하루는 뷰티데이를 정해 목욕을 하며 몸과 피부를 가꿨다고 하니, 나도 이 뷰티데이를 계기삼아 다시 심기일전하는 거다.

아마존에서 사둔 욕조에 걸치는 책받침대위에 핸드폰과 아마도 읽지않을 소설책을 올리고 느긋하게 등을 기대 누웠다.

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잘 돌아갔어?

제시려니 하고 답장을 하려다보니 번호가 다르다. 이름이 안뜬다. 제시는 제시라고 분명 저장되어있는데. 에이미인가. 그렇지만 나는 에이미에게 내 번호를 준적이 없는데. 망설이자 또 문자가 온다.

-나 선호야. 내 번호 저장했지? 이번에 만나서 진짜 반가웠어.

바에서 선호가 내 번호로 전화를 건뒤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서 저장을 안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실 두번다시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응 잘 도착했어. 한번더 봤으면 좋았을 걸. 다음에 기회되면 또 봐.

살짝 들뜬 기분으로 답문자를 보냈다. 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다시 진동이 울렸다.

-그러게. 아마 나 다음달 정도에 아틀란타에서 하는 세미나에 가게 될것 같아. 시간되면 주말에 만나자.

또 만나는건가 우리? 또 보는거야? 그것도 단둘이?

간만에 다시 심장이 기분좋게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지난번 쓰라린 실연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침착하려고 했지만, 오랫만에 남자에게서 받은 문자인데다 더군다나 그 남자가 우선호라니. 나중에 상처받더라도 오늘은 마음껏 설레고싶은 마음이 더 컸다.


월요일은 힘들다. 3일 연휴를 보내고 복귀한 월요일은 더더욱이. 하지만 오늘은 새벽 6시부터 가뿐하게 일어나 스텝퍼를 30분정도 날렵하게 밟아준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서랍속에 고이 넣어둔 맥 루비우 립스틱으로 메이크업까지 산뜻하게 마쳤다. 뉴요커 에이미가 안발라주면 어떤가. 내가 사서 바르면 되지.

검정 바지에 하늘색 블라우스를 받쳐입고, 마치 오늘이 금요일인양 들뜬 기분으로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시동도 경쾌한 내 하얀 아우디 A6를 타고 아파트 게이트로 가는 길에 지난번에 본 그 청년이 노란 골든 리트리버를 끌고 산책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 시간에 개와 산책이라니. 학생인가? 백수인가?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지 라고 생각하며 출근길에 나섰다.

연휴 이후의 회사는 한층더 혼돈스러웠고 점심먹을 새도 없이 바빴지만 선호의 문자가 머릿속을 떠나지않아 입가에는 계속 미소가 지어졌다. 개판오분전인 회의에서 평소 같았으면 제일 크게 화를 냈을 내가 잠잠하자 매니저가 오늘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로 선호 문자의 파급력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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