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ink Glove
Jul 21. 2019
우선 살부터 빼고 오겠습니다.
2-4 한 뉴욕 밤의 꿈
영화 'How to be single'을 본 이후, 뉴욕 고층 빌딩 위의 루프탑 바에 가는 것은 나의 오랜 로망 이었다. 그녀들처럼 하이힐에 볼드한 립 메이크업을 하고 또각또각 걸어들어가 낯선 남자와 설레는 첫 만남을 갖는 것을 꿈꿨었다.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가드에게 아이디를 보여주고 바에 들어섰다.
지붕이 없는 루프탑 바에서 보는 석양은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에이미가 로컬들만 아는 곳이라며 자랑스럽게 얘기해주자, 처음으로 에이미의 존재가 고마워지기까지 했다. 사방에 영롱한 구슬 전구들이 달려있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흰 커텐이 곳곳에 달려 바람에 흔들렸다. 그 안에는 당장이라도 앉고싶을 정도로 폭신해보이는 빈백들과 카우치가 널려있었다. 한편에는 의자없이 서서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높은 테이블이 여기저기 놓아져있어, 칵테일을 앞에 둔 남녀들이 기댄채 다정한 눈맞춤을 하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에이미는 놓칠 수 없다는 듯, 바에 들어서자마자 제시의 사진을 찍고있었다. 친구인 내가 보아도 그 장소에 그 옷차림의 제시는 시선을 사로 잡았다. 흥미로운 남자들의 눈빛과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여자들의 눈빛을 한발짝 떨어져서 구경하다보니 마치 내가 인스타 셀럽의 라이프를 옆에서 보고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바쁜 둘을 놔두고 바 카운터에 가서 크레딧 카드로 탭을 오픈한 후 에거밤 세 잔을 바텐더에게 부탁했다. 얼른 살짝 취한채 이 분위기를 즐겨보고 싶었다.
어느새 테이블을 차지한 에이미와 제시에게 한잔씩 나눠주고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이 후 에이미와 제시는 번갈아가며 칵테일을 샀고, 살짝 취기에 오른 우리들의 대화에는 열이 올랐다. 대학 동기였던 누구는 어디에 취직했다더라, 대학 공식커플이었던 누구누구는 한국에 취직해서 가버리는 바람에 헤어졌다더라, 얼마 전에 누구한테 문자가 왔는데 결혼 한다더라 등등 별 것 없는 대화에도 신이나서 웃고 떠들며 호응했다. 일이 늦어져 9시가 넘어야 조인한다던 선호는 새카맣게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너희들 나 빼놓고 너무 즐거운 거 아냐?'
흰 셔츠에 연한 회색 정장바지를 입은 낯선 모습의 선호가 에이미 옆자리의 빈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선호야 왜 이렇게 늦었어.'
에이미가 애교섞인 말투로 선호를 반겼다.
'다들 먼저 마셨구나. 이번엔 내가 살게.'
선호가 바 카운터로 가자 에이미가 자기가 잔 들고오는 것을 돕겠다며 얼른 일어섰다. 제시와 나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굴을 마주보고 씩 웃었다. 역시 쟤 아직도 좋아하네.
선호가 조인하자 대화는 더 흥미로워졌고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았다. 선호는 여전히 분위기메이커였고, 에이미는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살짝 오버스럽게 호응을 했다.
'나 선호가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것 오랫만에 봐.'
라고 에이미가 말할 정도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나와 제시도 서로의 근황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중간중간 번갈아가며 술잔을 채워온 덕에 점점 취기가 올라왔다.
'나 물 좀 마시고 올게.'
살짝 어지러운 느낌이 들자, 나는 물 좀 마시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카운터에서 바텐더에게 물 한잔을 부탁하고 기다리며, 이번엔 무슨 칵테일을 마셔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괜찮아?'
라며 선호가 등을 툭 친다.
'응. 오랫만에 신나서 마셨더니 좀 어지러워. 물만 마시면 괜찮을 거 같아.'
선호는 여전한 그 눈웃음을 지으며
'다행이네. 아 너 진짜 오랫만이다. 오랫만에 너랑 대화하니까 대학생 시절 생각도 나고 기분 좋다.하하.'
그리고는 선호는 물이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카운터에 나와 마주보고 서서 같은 전공이었던 동기들 이야기며 대학교수들 이야기, 지금 직장에서 우연히만난 대학 친구 이야기까지 쉼없이 쏟아냈다. 에이미가 선호를 찾으러 오기 전까지, 족히 한 30분을 둘이서 대화를 했던 것 같다. 테이블에 돌아오고나서도 선호는 계속,
' 아 젬마 너랑 이야기하니까 정말 좋다. 예전 생각도 나고.'
라고 되풀이했다. 동종 업계에서 비슷한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아낸 우리는 점점 열띈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살짝 에이미의 눈치를 보며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먼저 일어섰다. 제시도 함께 가자고 일어섰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려는데 제시가 등을 톡톡치며,
'둘이 잘 어울리던데. 선호가 너 좋아하는거 아니야?'
'아냐,무슨. 에이미가 들으면 난리난다.'
화장실을 나오는데 선호가 앞에 서있었다. 제시가 눈치껏 먼저 자리로 돌아가자, 선호가 자기 핸드폰을 내밀며
' 우리 연락하고 지내자. 너 전화번호 바뀌었지? 나도 좀 알려줄래?'
굳이 안 알려줄 이유도 없어서 번호를 찍어주자 선호도 통화버튼을 눌러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 번호야. 저장해 둬.'
2차를 코리아 타운으로 가자는 에이미의 제안에 선호는
' 미안, 나 내일도 회사 나가봐야해서.'
라며 미안한 얼굴로 거절을 했다. 에이미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제시가 에이미의 눈치를 살피며
'그럼 우리도 슬슬 가서 쉬어볼까?'
라며 일어섰다. 우리 넷은 밤 늦은 뉴욕거리를 걸어 선호와 에이미가 사는 아파트까지 걸어왔다. 평소같았으면 당연히 우버를 탔을 거리지만 넷이서 다시 20대라도 된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더더군다나 남자가 한명있으니 살짝 든든해서 즐겁게 걸어왔다.
'잘들 가고. 다음에 또 뉴욕오게되면 연락해.너무 반가웠어.'
선호는 제시와 나를 한번씩 안아주며 인사했다. 에이미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선호는 에이미에게
'조만간 또 보자.'
라고 인사하고 손을 흔들며 먼저 계단으로 올라갔다.
에이미의 방에 들어서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뉴욕의 밤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짧았고 빠르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