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Unsplash의Devi Puspita Amartha Yahya
종현과 찬미가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오래된 빌라의 투룸에서 함께 생활한 지도 어언 반년이 지났다. 둘은 많은 청년들이 그렇듯 취업을 위해 등 떠밀려 원치 않는 상경을 했다. 일단 취업이 되기 전까지 생활비는 벌어야 했기에 평일마다 찬미는 고깃집에서, 종현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딱히 친하게 지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같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둘 사이가 각별해지는 일은 없었다. 서로 일하는 시간대가 다르기도 했고, 취업 준비를 이유로 하루 종일 각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 대부분이라 이야기도 거의 잘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에 두 번 정도 둘이 함께하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주말마다 진행되는 봉사 활동이었다. 경로당이나 보육원을 찾아가 함께 김밥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주요 활동이었는데, 둘은 거기서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종종 손을 보탰다. 대단한 열정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래도 한 사람 몫을 한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단발성으로 하려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얄궂게도 둘이 함께 봉사를 나가는 날이면 매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외출 전 일기예보를 확인할 때는 비가 온다는 소식이 전혀 없었음에도, 열심히 김밥을 말다 보면 날이 흐릿해지더니 결국은 비가 내렸다. 예측되지 않는 날씨 때문에 매번 우산을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라, 둘은 항상 비에 쫄딱 젖은 채로 귀가했다. 종현은 빗물에 젖은 김밥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마음이 함께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편의점 야간 타임에 맞춰 출근해야 하는 종현이 집을 막 나섰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동네 마트 상호가 새겨진 비닐봉지를 들고 휘적휘적 걷는 찬미가 보였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찬미의 몸에서는 매캐한 연기와 고기 기름 냄새가 살짝 풍겼다.
“퇴근?”
“응.”
“뭐 샀어?”
“김밥 재료.”
“또?”
근 3주 간 찬미는 봉사를 하지 않는 평일에도 집에서 김밥을 만들어댔다. 조금 의아했던 건 정작 만드는 본인은 김밥에 전혀 입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종현이 서성거리며 한 알씩 쏙쏙 빼먹다가 결국 한 줄을 다 먹어 치워도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종현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출근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했기에 궁금증을 지우고 얼른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 7시 15분. 야간 타임 근무를 마친 종현이 돌아왔다.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집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던 종현은 거실 겸 주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악!”
종현이 비명을 꿱 지르자 상대도 화들짝 놀랐다. 찬미였다. 분명 이 시간이면 한창 자고 있어야 했을 찬미는 우두커니 서서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뭐 하는데?”
종현이 불을 켜며 책망하듯 물었다.
“조용히 하고, 너 김밥 좀 말아야겠다.”
찬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탁자 위에는 이미 전부 다듬어진 김밥 재료들이 그릇 위에 쌓여 있었다. 계란 지단과 시금치, 햄, 단무지, 오이 다섯 가지였다. 마침 출출했던 종현이 지단 한 줄을 집어 들자, 찬미가 손등을 때렸다. 찰싹 소리와 함께 지단이 펄럭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단 만들고 먹어라.”
종현은 입을 삐죽거리며 손을 대충 씻곤 천천히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찬미도 옆에 서서 김 위에 밥을 깔고 재료를 차곡차곡 쌓았다. 종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완두 콩밥을 준비해 놓은 찬미 때문에 마음이 조금 간질거렸지만, 아직 맞은 손등이 얼얼했기에 굳이 티를 내지는 않기로 했다. 꾸준히 봉사를 다니며 다져진 기술로 인해 둘은 빠르고 완벽하게 통통한 김밥을 한 줄씩 완성했다. 찬미는 완성된 김밥 두 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종현이 식칼을 쥔 채 이걸 썰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찬미가 베란다로 달려갔다. 종현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밥을 썰었다. 꽁다리를 하나 집어 입에 넣는 순간, 찬미가 다시 달려와서 외쳤다.
“비 온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종현의 목뒤로 밥알이 잘못 넘어갔다. 쿨럭거리며 급하게 물을 따라 마시던 종현은 찬미가 왜 비가 온다고 외쳤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비가 온다. 매번 경로당이나 보육원에서 김밥을 만들던 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던 것처럼. 찬미가 그동안 김밥 재료를 매번 사 왔던 이유는 김밥을 만들면 비가 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