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무지를 넣어야 해(完)

사진 : Unsplash의Devi Puspita Amartha Yahya

by 주이슬


이후 둘은 몇 번의 실험과 연구를 거치며 비가 내리는 조건을 함께 정리했다.


1.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둘이 함께 김밥을 만들어야 한다.

2. 몇 줄인지는 상관없지만 한 사람당 최소 한 줄은 만들어야 한다.

3. 재료는 다섯 개 이상 들어가야 한다.

4. 그중 하나는 꼭 단무지가 있어야 한다.

5. 비가 내리는 범위는 반경 5km 정도인 듯? 이건 확인 작업이 더 필요하다.


종현은 자신의 공책에 실험 내용에 대한 일지를 적어 내려갔다. 찬미와 함께 김밥을 만들면 비가 온다. 반경은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5km 정도나 된다. 어찌 보면 대단한 능력이라 할 수 있겠으나 막상 실생활에서 쓸 일은 거의 없기도 했다. 이것으로 세상이 바뀌는 엄청난 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고, 지구는 여전히 한 축을 고수하며 자전했다. 국제 비밀 기관에서 둘의 능력을 감시하다 갑자기 납치해서 가두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봉사 도중 누군가 “오늘도 비가 오네.”라고 중얼거리면 서로를 쳐다보고 쿡쿡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정도의 즐거움만 더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괜찮았다. 이제 둘은 봉사를 갈 때마다 당당히 우산을 챙겨 갔다. 종현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내리는 비가 되레 반가워졌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찬미도 매번 콧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자신과 같은 마음인 듯했다.


그렇게 별다를 것 없는 날을 보내던 중, 드디어 비 내리는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둘은 주말에 시간을 내서 찬미네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찬미네 부모님이 귀농 후 거주하는 집이었다. 올해 겨울은 유독 가물어 월동 중인 마늘이 걱정이라는 부모님의 푸념섞인 말을 들은 것이 이유였다. 하루 정도 머물면서 김밥을 좀 만들어보면 미미하더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유용하게 사용될 일이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현은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종현은 찬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 근처에서 망고와 샤인머스캣, 제철 과일 12과가 들어간다는 프리미엄 과일바구니를 구매했다. 제법 묵직한 바구니를 손에 쥐고 있자니 ‘번듯한 직장에 취업한 뒤 명절 선물 세트를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집에서 동서울종합터미널로 가 청송 버스터미널까지, 거기서 또 찬미네 부모님 집까지 총 6시간가량의 여정을 거쳐야 했다. 근처 마트에 들러 김밥 재료까지 사서 부모님 집에 도착했을 땐 둘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과일 바구니를 계속 들고 있느라 종현의 손가락이 부서질 듯 아팠다. 그래서 신발을 벗자마자 바구니를 현관 옆에 대충 내려놓고 손가락을 주물렀다.


거실에 빳빳한 자세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거나 찬미네 부모님 눈치를 보는 것 말곤 할 게 없어서 심심했지만, 한편으로는 맑은 공기와 시야가 탁 트이는 전경을 바라보니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다 같이 저녁을 먹고 틀어 놓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던 그때, 종현의 콧속에 매캐한 냄새가 타고 들어왔다. 찬미도 같은 냄새를 맡았는지 킁킁거렸다.

“엄마, 뭐 타는 냄새 안 나?”

“논두렁 태우나 보지 뭐.”

“논을 왜 태워?”

“해충도 잡고, 필요 없는 것들도 태우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종현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농촌, 밭, 태우기 등의 단어를 검색해 봤다. ‘산불’ ‘태우지 말고’ ‘각별한 주의’ ‘인제 그만’ 등의 글자가 박힌 기사 제목들을 쭉 훑고 있자니 손에 땀이 배었다. 하지만 본인을 제외하곤 다들 평온해 보였기 때문에 괜한 호들갑을 떨기는 싫어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눈은 텔레비전에 고정돼 있었지만 그 외 온 신경은 계속해서 흘러 들어오는 냄새에 집중돼 있었다. 종현은 축축해진 손을 바지에 쓱 문지르며 얼른 이 냄새가 멎길 기다렸다.

약 십오분쯤 지났을 무렵, 찬미의 아빠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곤 “씁”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돌아왔다. 종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저거 뒤쪽에 산까지 옮겨붙은 거 같은데.”

“어딘데?”

“황 씨네.”

갑자기 찬미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상기되고 콧구멍이 살짝 커져 있었다.

“뭐 하러! 너네는 일단 가만히 있어.”

찬미의 부모님이 손사래를 치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종현은 알고 있었다. 찬미가 벌떡 일어난 이유는 밖을 나가보기 위함이 아님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종현이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김밥 재료를 꺼낼 동안 찬미는 밥에 소금과 참기름을 치기 시작했다.

종현은 찬미의 손이 떨리는 걸 보며 심호흡했다. 그리곤 그릇에 참치를 털어 넣고 마요네즈를 쭉 짠 다음 주물럭거렸다. 밥에 간을 맞추는 데 집중하던 찬미가 그 모습을 보고 핀잔을 주었다.

“이 상황에서도 마요네즈에 버무려야겠냐? 대충 넣지?”

“너는 참기름 치고 있으면서 뭘….”

갑자기 찬미의 눈이 둥그렇게 커지더니 종현의 말을 끊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단무지!”

종현은 기계적으로 참치를 주무르며 테이블 위를 바라봤다.

“햄, 시금치, 참치, 당근…….”

찬미 말대로 단무지가 보이지 않았다.

“말이 안 되는데. 분명히 샀는데.”

마음이 불안해질수록 참치를 조물조물하는 손짓이 빨라졌다. 찬미는 얼이 빠진 듯 “분명히 샀는데”라는 말만 반복했다. 눈을 어찌나 크게 떴던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종현이 빠르게 영수증을 찾아왔다. 판매 품목에 단무지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맨 위 칸부터 아래 칸까지 뒤진 다음 냉동실 문과 김치냉장고 문까지 열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비닐봉지도 전부 열어봤지만, 말린 멸치나 고춧가루 따위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단무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발….”

정신없이 주방 서랍장까지 뒤져보던 종현의 심장 부근이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 찌릿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종현은 현관 앞으로 달려가서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과일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그 옆에 단무지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종현은 포효하며 단무지를 손에 쥔 채 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양말이 미끄러진 탓에 허리를 약간 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둘은 양손마다 완성된 김밥 한 줄을 꼭 쥔 채 집 밖으로 나갔다. 이웃 주민 몇몇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이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연기가 무척 크게 피어오르는 것만은 분명했다. 조금 더 밖으로 나가서 살펴보니 산 들머리에 새빨간 불이 점점 위를 타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불길이 세 보이지는 않았지만 새카맣게 탄 재가 빠르게 영역을 넓혀나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자 연기가 더욱 짙게 피어올랐다. 새들이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동네 개들이 컹컹 짖었다. 매캐한 연기가 옷에 스며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종현은 찬미가 고깃집에서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항상 풍기던 연기 냄새를 떠올렸다. 종현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매캐함이 배어 있을 찬미의 옷소매로 시선을 옮겼다. 찬미의 작은 손에 쥐여 있는 김밥은 금방이라도 옆구리가 터질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종현은 작게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 무언가 눈가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헉’하고 숨을 들이켜며 손등으로 눈가를 훑었다. 물기가 어려 있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김밥을 쥔 손바닥 안으로 빗물이 흘러들었다. 김에 스며든 참기름이 미끈거렸다. 종현은 앞으로의 삶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란 사실을 직감하며, 조용히 비에 젖은 김밥을 우물거렸다. 찬미 역시 홀린 듯 김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둘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힘을 잃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종현의 심장은 쉴 줄을 모르는 듯 세차게 뛰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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