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은 언제나 눈사람인 채로(1)

이미지 출처: Unsplash의Juno Jo

by 주이슬




지우개. 나의 초등학생 시절 별명이었다. 30대 중반이 된 요즘에서야 그 별명을 새로이 복기하고 있다. 같은 회사의 직원들 연락처 8개. 거래처 직원들 연락처 13개. 총 21개. 연락을 안 하고 지낸 지 2년 이상 된 사람들을 전부 정리하고 남은 카카오톡 ‘친구’ 목록이었다.

[web 발신]이 붙은 광고성 메시지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전화를 보며 내 이름은 뒤에 '개'가 붙어야. ‘윤지우개’까지가 되어야 그게 진짜 이름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릴 적 윤지우개가 아니라 다른 별명으로 불렸다면 지금쯤 흐릿한 존재 말고 다른 게 되지 않았을까. 다른 별명으로 불린 윤지우들의 평행 세계가 있다면 각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상상들.

분명 옛날엔 친구들도 많았던 거 같은데.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군가와 어울리는 일들이 줄어들었다. 다들 특별하게 날 피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나서서 챙겨주지도 않았다. 아침 일찍 등교해서 밤 11시까지 강제로 심야 자습을 하던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대학은 누군가와 온종일 붙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학과에서 행사를 한다며 오천 원씩, 만 원씩 걷어가는 회비가 은근히 부담이라 참여하지 않기를 두세 번. 키가 크고 훤칠하게 생겨 인기 많았던 학회장 선배가 “지우는 왜 참여 안 해? 재미있는데”라며 채근하기도 두세 번. 그럴 때면 재치 있는 대답을 하고 싶으면서도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며 “아….” 하는 모호한 반응을 남기고 도망쳤다, ‘다음번에도 말 걸어줬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남몰래 되새김질하면서.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그 이후로 딱히 학회장 선배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죽을 때까지 혼자로 남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몇 년에 걸쳐 나름대로의 노력을 해왔는데, 그것은 바로 각종 소모임에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제일 처음 참여했던 건 영화 감상 모임이었다. 하지만 ‘아트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상영관에서 틀어주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다. 내가 ‘얘는 왜 갑자기 절벽에서 뛰어내린 거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면, 모임원들은 한껏 촉촉해진 눈으로 ‘막다른 선택이 없던 주인공에게서 연민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그들 사이에 있으면 내 시시한 안목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만 같아 참석 욕구가 금방 시들해졌다.

그 뒤에는 비건 식당을 탐방하는 채식 모임에 가입했다. 마침, 그즈음 공장식 축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고 채식에 관심이 생겨 덜컥 참여한 것이었다. 어쩐지 모임 회원들은 대부분이 깡말랐고, 목소리도 작았다. ‘채식을 해서 힘이 없나.’ 그런 생각을 하며 언젠간 깡말라서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고, 작은 목소리 덕분에 신비로워 보이는 나를 상상했다. 모임원 중 대부분은 동물권에 관심이 있거나 기후 변화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에겐 너무 어려웠고 사실 별로 깊게 알고 싶지 않은 세계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 모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무척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명상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엄지와 검지를 맞붙이고 무릎 위에 손을 얹는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다. 생각을 비우다가… 곧장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나를 상상한다. “어머, 윤지우 씨 명상도 해요?” “아 네. 한 지 10년 정도 된 거 같은데….” “와 대단하다. 어쩐지 윤지우 씨를 보면 다가가기 어려운 오라가 있었는데, 역시 명상 덕분이었군요.” 놀라는 척하는 진행자의 말에 겸손한 척 대답하는 날 보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유튜브로 명상 가이드를 틀어 놓으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지나간 날에, 아직 다가오지 않을 미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현재에 집중하세요.”

그러니까 지금 내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데는 과거의 어떤 이상한 행동이라든가, 앞으로 마주칠 사람들에게 쉽게 섞이지 못하는 성질 때문일진대. 여기에 매몰되지 말고. 그냥 지금 숨 쉬는 순간에 집중하면, 삶이 달라질 거라고.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여기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가입한 것이 바로 명상 소모임이었다. 막상 참여를 해보니 그곳에는 이미 나보다 스무 단계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오로지 나만 이 지구에 두 발을 끈끈히 붙인 채 떠오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을 파악해 보면 내 안의 결핍이 보인다나 뭐라나.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그 결핍을 찾아서 이해해야 한다나 뭐라나. 대체 내 마음속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길래 사람들이랑 조금만 어울려도 금방 벗어나고 싶어지고, 그러면서도 관심받고 싶어 못 견디는 건지. 남몰래 구시렁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그 모임도 그만두고 만다.

그게 약 한 달 전. 그 뒤로 자꾸만 옛날 별명을 곱씹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부터 어떤 이들은 내가 지우개일 걸 미리 예견하고 그걸 별명으로 선택한 거 아닐까. 그러니 윤지우개는 평생 지워지는 존재로 남지 않을까, 하고.





+ 밀리의 서재에서 주관하는 출간 공모전 준비 관계로 엽편 모음집은 당분간 일주일에 1회 월요일에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Q. 브런치북 편집에서 업로드 요일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 왜 굳이 여기에 쓰냐

A. 제가 나대느라 브런치북 업로드 요일을 이미 한 번 수정해서 12월 20일쯤이 되어야 다시 연재 요일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장편 정비를 마치면 브런치북으로도 동시 연재할 예정이랍니다 ^_^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공모를 확인해 보세요



월요일 연재
이전 05화단무지를 넣어야 해(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