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Unsplash의Juno Jo
그렇게 소모임을 전전하던 생활을 끝내고 새로이 도전하게 된 것이 바로 ‘당근마켓’이었다. 중고 거래 플랫폼이었지만 동네 기반 서비스다 보니 종종 같이 놀러 갈 사람, 밥을 먹을 사람을 찾는 글이 올라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보단, 일대일로 만나는 게 더 가까워지기 쉬울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저녁 저랑 같이 눈사람 만드실 분! (여성 분만)
시선을 끈 글이 하나 있었다. 글을 쓴 ‘시금치 시러’는 서른 살 여자인데, 나이는 상관없지만 동성과 함께하는 게 편할 거 같다고 했다. 눈사람을 실컷 만들다 지치면 카페에 가서 커피도 한 잔 마시자고. 계속 고민하다 결국 댓글을 남겼고, 시금치 시러는 1분도 안 돼 1:1 채팅을 요청했다.
근처 작은 공원에서 만난 그는 긴 생머리에 단정한 앞머리, 동그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직경이 큰 밝은 회색 콘택트렌즈를 끼고 있었는데, 그게 과한 것 같으면서도 계속 보고 있자니 은근히 잘 어울렸다. ‘시금치 시러 님’이라고 부르기엔 어쩐지 낯 간지러워서 이름을 물어보자, ‘주지우’라는 이름이 돌아왔다.
“어, 저는 윤지우인데.”
“정말요? 그럼 혹시 어렸을 때 별명이 쥬쥬였어요? 쥬쥬 인형 있잖아요. 그걸로 얼마나 놀림을 받았던지.”
그러고 보니 그 인형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요, 저는 지우개였어요.”
“아 맞다. 저도 지우개라고 몇 번 불리긴 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주 씨라서 그런가? 주쥬, 주쥬, 그러다 쥬쥬라고….”
그러니까 너는 쥬쥬 인형이고, 지우개는 아니다? 선을 긋는 건가, 지금?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상대방의 의도를 곡해해서 마음대로 생각하는 데는 묘한 쾌감이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주지우는 한참 자신의 별명에 대해 떠들다가 그러면 시작해 보자며 눈을 뭉쳤다. 마지막으로 눈사람을 만들어 본 게 언제 적이었더라. 나도 그를 따라 눈을 한 움큼 퍼 올렸다. 차갑고 축축한 감각이 손바닥과 마디마디를 찔렀다. 손에 입김을 불어 넣고 문질러가며 조랭이떡처럼 생긴 작은 눈사람 군단을 만들었다.
주지우가 만든 눈사람은 형태가 다양했다. 곰돌이처럼 둥근 귀를 붙인 눈사람도 있었고, 토끼 모양도 있었다. 그걸 보니 나 역시 동물 모양으로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따라 한다는 인상을 줄까 봐 조랭이떡만 줄기차게 만들어댔다.
“허리 아프다! 저 더 이상 못 만들겠어요.”
주지우가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시간을 보니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춥지 않아요?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면 좋겠네.”
주지우는 그렇게 말하며 넉살 좋게 팔짱을 껴왔다. 우리는 건널목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음료를 한 잔씩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 책을 읽으러 자주 오는 곳이었는데, 일행이 있던 적은 처음이라 괜히 내부의 노란 조명부터 테이블과 의자의 나뭇결까지 새로워 보였다.
주지우는 커피를 마시는 동안 본인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금은 여기서 오 분 정도 떨어진 빌라에서 살고 있는데 약 삼 개월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왔다고 한다. 작은 광고 회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으며 원래는 일주일 만에 그만두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4년 동안 일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들. 고향은 경남 하동인데 지금은 부모님도 진주로 이사하셔서 하동에 갈 일이 거의 없지만 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십리벚꽃길이나 그걸 보러 바글바글 몰리던 사람들. 그런 게 간혹 그리워지곤 한다는 이야기들.
나에 대해서도 몇 가지를 물어봤다. 몇 살인지, 본인이 네 살 어리니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지, 여기서 나고 자랐으면 동네 친구들이 좀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제가 너무 많이 물어봤죠. 꼭 호구조사 하는 것처럼.”
민망한 표정으로 괜히 커피를 홀짝이는 주지우에게 미소를 장착한 다음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만난 사이라면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정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나도 내 이야기를 몇 가지 늘어놓았다. 내 친구들 ̄친구가 한 명도 없다고 하면 이상해 보일까 봐 거짓말을 한 것이었지만, 아무튼 ̄은 일자리를 찾아서 멀리 다른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래서 나 역시 동네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사람을 사귀는 게 힘이 든다. 노력도 해봤지만 먼저 다가가는 게 어렵다. 그런 것들. 깊은 속내인 척하지만, 사실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표면적인 고민이라 쉽게 꺼낼 수 있는 것들.
내 말이 길어질수록 주지우의 눈이 점점 더 반짝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저도 동네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언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우리가 서로 친구 해주기로 해요, 네?”
나는 머뭇거렸다. 사실 일회성 만남으로 그칠 것으로 생각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직 더 말을 나눠보고 지내봐야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주지우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당장 친구로 지내지는 않더라도 몇 번 더 만나볼 수는 있지 않을까? 주지우는 그런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별로 안 내키는 거면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는 그런 거로 상처 안 받아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주지우는 예쁘장하게 생겼고 붙임성도 있으니 굳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잘 지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는 그의 뇌리에서 잊힐 것이다. 남아 있는 나는 슬퍼질 것이다. 쥬쥬와 지우개는 각기 다른 숙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안 될 일이었다.
“저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우리 이름도 같은 게,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오히려 과장을 곁들이게 됐다. 그 말을 들은 주지우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카페에서 두어 시간가량이나 대화를 더 나누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자꾸만 속의 말이 나가려고 했다. 가령 사실은 너무나도 외롭다고. 평생을 사무치게 외로워하며 살게 될 거 같다고. 그럴 바엔 차라리 일찍 죽었으면 한다는 그런 말들. 꺼내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정말 깊은 속내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지우와 함께했던 공원에 잠시 들렀다. 거기서 내가 만든 작은 눈사람 하나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냉동실이 그 눈사람의 집 역할을 했다.
휴대전화를 보니 그새 주지우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 즐거웠다고, 다음 주말에 같이 밥이나 먹자는 내용이었다. 알겠다는 대답을 보낸 뒤 22명으로 늘어난 친구 목록을 계속해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