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Unsplash의JOGsplash
2
몇 주가 흘렀다. 여름의 초입. 오후 두 시쯤이면 땡볕 때문에 몇 발짝 걷지 못하고 결국 정자에서 휴식을 하게 되는 계절. 그 햇살 아래 하우스 안 토마토가 영글어가는 때. 아침에 눈을 뜨니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가 묘하게 부산스러웠다. 방을 나가니 아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엄마만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일어났나? 아빠는 이장님 데리러 갔다.”
“왜?”
“효연 아줌마네 애기가 곧 나올 거 같아가. 이장님이 기도를 해주셔야지. 엄마도 곧 도와주러 갈라꼬.”
“내도 돕고 싶다.”
엄마가 그 말을 듣더니 긴장이 조금 풀린 얼굴로 내 코를 톡 쳤다.
“니는 유나네 가서 같이 놀고 있어라. 애기 태어나면 바로 데리러 갈게.”
그렇게 나는 아침부터 눈을 비비며 유나네 집을 향해야 했다. 조금 피곤했지만 같이 놀 생각에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유나네 집은 분토골마을 서쪽 끝자락에 있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 근처,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산을 열심히 올랐다. 15분 정도만 걷다 보면 작게 형성된 매실나무 군락이 나온다. 나랑 유나는 매실을 하나씩 딴 다음 앞니로 살짝 과육을 짓이겼다. 청매실이 설익어서 신맛이 더욱 강할 때였다. 매실을 통으로 먹으면 배앓이를 했기 때문에 새어 나오는 즙만 입술에 바른 다음 그걸 빨아먹었다. 입이 절로 오그라드는 신맛이 사라지면 그 위에 또 즙을 묻혀서 입술을 핥았다. 그런 날이면 우리의 입술은 하루 종일 퉁퉁 불어 있었다.
유나는 자주 호승심이 불타오르는지 매실 하나를 다 먹어 치우는 내기를 하자고 했다. 그러곤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로 그 신 걸 아무렇지 않은 척 먹어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양 침샘이 시큰거렸다. 유나는 허겁지겁 열매를 먹어 치운 뒤 혀를 내밀고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억수로 찡하다.”
그 뒤에는 양팔을 벌린 채 뒤로 넘어가며 털썩 누웠다. 거기까지가 매실나무 군락에만 오면 항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 새그러운걸 와 묵노.”
“내 맘이다.”
유나는 새초롬하게 받아치더니 벌떡 일어나 매실을 세 개 따서 주머니에 욱여넣고 다시 누웠다.
“집에 가서 묵게?”
“아니. 엄마랑 이모야가 아줌마 애기 낳는 거 도와주러 갈 거라 캐서. 이거 두 개는 우리 엄마랑 이모야 주고, 하나는 애기 줄 거다.”
그 말을 듣던 나도 우리 엄마랑 아빠가 생각나서 열매 세 개를 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애기 이름은 정했다나?”
“몰라? 저번에 아줌마가 내한테 하나로 지을 거라고 카던데. 확실한 건 아이다.”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유나를 힐끗거렸다. “니랑 합치면 한아름이네? 동생 생긴 거 같아서 좋겠다.”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유나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진 않은 것 같았다.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내 꼬리 끝을 살살 잡아당기며 말했다.
“다리 안 아프나? 니도 여 와서 같이 눕자. 억수로 푹신푹신하다.”
나는 유나가 누워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내 발걸음에 맞춰 풀이 누우며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세 걸음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였는데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지. 날 빤히 쳐다보는 그 얼굴을 보며 걸으려니 억만 겁 같았다. 내가 곁으로 겨우 다가가자, 유나는 옆으로 살짝 비켜준 다음 내가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줬다. 나는 왜인지 쉽게 눕지를 못하고, 한동안 괜히 쪼그려 앉아 있다가 다리가 저릿해질 때쯤에야 뒤로 털썩 누웠다. 풀잎이 귓가와 얼굴을 간지럽혔다. 떨어진 매실나무잎이 간간이 목덜미를 찔렀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와 눈이 부셨다. 나는 유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나는 햇빛과 눈싸움이라도 할 작정인 듯 하늘을 정면으로 응시 중이었다. 햇살을 잔뜩 받은 유나의 눈동자가 검게 빛났다. 문득 지금 내 홍채는 어떤 색일지 궁금해졌다. 햇빛 때문에 옅은 색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유나처럼, 엄마처럼, 견하할매처럼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으면.
“유나야.”
유나가 홱, 고개를 돌리자 새콤한 매실 향이 훅 끼쳤다.
“지금 내 눈 있다아이가, 무슨 색이야?”
나는 햇빛이 눈가에 닿지 않도록 슬쩍 고개를 빼며 물었다. 유나가 몸을 반쯤 일으켜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무에 달려 있던 매실 하나가 떨어지며 “툭… 투둑….” 소리를 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유나가 천천히 검지를 왼쪽 눈가 옆에 가져다 댔다. 눈이 움찔 감겼다.
“음…. 이짝은 고동색.”
검지가 천천히 움직이며 이번엔 오른쪽 눈가 옆에 닿았다.
“이짝은 햇빛 때문에 밝은 갈색.”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 맞나? 신기하네.”
유나는 여전히 내 눈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쁘다, 야.”
쏴…. 바람이 불면서 유나의 윤기 나는 머리가 흩날렸다. 짓이겨진 풀의 풋내가 함께 실려 내 코에 와 닿았다. 나는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부디 바람에 묻히길 바라며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는 동안 밝은 햇살이 유나와 나를 따끈하게 구워냈다. 서서히 노곤함이 밀려왔다. 유나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유나는 다시 뒤로 털썩 눕고는 이윽고 잠에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의식이 점점 까물까물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름아!”
멀리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아름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인 걸 인식 하자 눈이 번쩍 뜨였다. 몸을 일으킨 나는 유나네 어머니가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 옆에서 자고 있던 유나도 그새 깼는지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며 일어났다. 그리곤 꼬리를 살짝 좌우로 한 번씩 흔든 뒤, 기지개를 켰다. 경쾌한 움직임이 퍽 멋있어 보여서 나도 괜히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아주머니는 살짝 밭은 숨을 뱉으며 말했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엄마는요? 엄마가 저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요.”
아주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한차례 작게 벌렸다가, 곧 다물어버렸다. 바람이 다시 한번 쏴 불었다. 순식간에 공기가 축축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언제 숨었는지 태양은 종적을 감추었고, 그 자리엔 비구름만 꾸물거리고 있었다.
“너거 어머니는 지금 바빠가 내가 대신 왔다. 얼른 가자.”
“엄마, 애기는?”
유나가 아주머니의 소매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유나 니는 집에 있어래이. 엄마는 아름이 델따주고 이모야랑 금방 돌아올게.”
아주머니는 대답 대신 걸음을 재촉했다. 그늘진 눈을 보니 심장이 콩닥거렸다. 산속은 점점 강해지는 바람 때문에 사박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정신이 쏙 빠질 정도였다. 유나도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더 이상 보채지 않고 집으로 조용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