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Unsplash의Jei Lee
“다정한 아이로구나. 네 이름이 뭐고?”
“저는……. 견하라고 카는데요.”
아이가 겨우 입을 떼서 이름을 알려주니까, 산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어.
“나는 네가 두 발로 겨우 걸을 때부터 지켜봐 왔다. 언젠간 네가 나를 깨워줄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지. 덕분에 내 오랜 갈증이 해소되었으니, 소원을 들어줄꾸마.”
“진짜로요?”
애가 그 말을 들으니까 억수로 신이 나가, 이곳저곳을 방방 뛰어다녔어. 그러자 다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단, 나를 위해 한 가지를 더 해줘야 하는데, 할 수 있겠나?”
아이가 산의 손가락을 꼭 부여잡고 침을 삼켰어. 얼마나 떨렸겠노.
“니도 알다시피 산은 순수한 것들로 가득 차야 한다. 네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선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지. 동이 트기 전 새벽의 맑은 공기, 가장 먼저 퍼 올려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물…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아이의 이름.”
산이 아이의 머리에 살짝 입을 맞추면서 말을 이었어.
“네 육신과 혼을 나에게 주려무나. 그럼 난 네 이름을 얻을 수 있단다.”
망설임도 잠시, 아이는 곧 결심한 듯 단단한 눈으로 산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대.
“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오늘 밤에 다시 찾아올게요, 약속해요.”
아이는 곧장 마을로 달려갔어. 가장 먼저 집으로 가서 병상에 누워있는 부모님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지. 곧 집 앞 또랑으로 가서 물을 길어와 따스하게 데핀 뒤, 수건을 적셨어. 그리곤 부모님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드렸지. 그 다음엔 곳곳을 둘러봤는데, 뭔가 허전해. 그 집 안에는 화분이 하나 있었는데, 원래는 우리 집처럼 시누대가 심겨 있었거든? 그게 잡귀가 들리면서 완저이 시들어 뿟는 거라. 얘가 그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뒷산에 자라고 있던 시누대를 하나 뽑아서 화분에 다시 심고 물을 줬어. 걔네 부모님이 시누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는 쏴 소리를 억수로 좋아하셨거든. 아이는 다시 한번 집안을 둘러보고 난 다음에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부모님 뺨에 조용히 입을 맞췄어.
“사랑해요.”
그 말을 남기곤 집을 나섰지.
그날 밤, 아이는 약속과 달리 나타나지 않았어. 한참 동안 아이를 기다리던 산은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서 기지개를 크게 켰어. 숲에 살고 있는 식물들은 꽃봉오리를 닫고 동물들은 하품을 했지. 산이 몸을 웅크리려던 찰나, 나무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카대. 자세히 살펴보니까는 아이가 나무 뒤에 숨어서 울고 있었다 안 하나. 눈물이 닿은 자리에는 아이의 부모님이 좋아하는 시누대 싹이 솟아나고 있었어. 산은 부드러운 이끼로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대.
“시누대로구나.”
아이는 말없이 눈물만 퐁퐁 흘렸지. 산은 그걸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줬고. 한참이 지나서 아이가 입을 뗐어.
“무서워요.”
“쉬……. 개않다, 고마.”
산이 나긋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줬어.
“제가 겁쟁이라서 실망하셨죠?”
풀 죽은 아이의 말에 산은 빙긋 웃었어.
“야야. 네 심장에는 용기가 있어야 할 자리까지 따스함으로 채워져 있어서 그렇다. 그걸 바로 자애로움이라 칸다. 그건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거데이.”
“진짜로요?”
“그래. 나는 거짓말은 안 한다.”
아이는 눈물을 그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 그러자 산은 다정하게 자리를 열어주었지. 아이는 한 걸음, 한 걸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천천히 산과 하나가 되었어. 그러자 온갖 생명들이 만개하면서 땅까지 길게 끌리는 단단한 꼬리로 변했다 카대. 꼬리 끝부분에는 시누대가 빽빽하게 자라났고. 바람이 불면서 “쏴”하는 소리가 후동리 온 마을을 채웠어. 견하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산은 곧 손을 하늘로 뻗어 별의 부스러기를 가져와 옷을 지어 입었어. 그러자 온 생물의 지혜를 담고 있던 눈동자가 점점 짙어졌지. 종국엔 칠흑 같은 검은 빛으로 아름답게 변했어.
말을 하던 엄마는 목이 잠기는지 잠깐 보리차를 가지러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이불을 폭 뒤집어쓴 채 이제 막 견하라는 이름을 가진 멋진 산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돌아온 엄마는 나에게도 보리차를 한 모금 주었는데, 구수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뜨끈하게 퍼지자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잠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목을 한참 가다듬던 엄마는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힘이 생긴 산은 곧장 작은 마을로 성큼성큼 걸어가 다친 부부의 집에 맑은 숨결을 불어 넣었어. 그제야 두 사람은 언제 잡귀에게 시달렸냐는 듯 개운하게 깨어날 수 있었다 카네. 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길게 자란 꼬리를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달아줬대. 덕분에 사람들은 단단한 꼬리로 땅을 지탱할 수도 있고, 높이 뛰어오를 수도 있게 됐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는 꼬리를 휘둘러 잡귀들을 내쫓았지. 결국 잡귀들은 멀리 도망가고 그 뒤로 지금까지도 후동리에 얼씬도 몬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산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며 산신으로 추앙했어. 산신은 아주 오래도록 후동리 사람들과 함께 지냈어. 침략자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농사를 지으면 매번 풍년이었지. 처음엔 아이의 모습을 하던 산이 시간이 흐르면서 젊은 여자가 되었고, 중년의 모습을 했다가 나중엔 할머니의 형상을 하게 됐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원래 산신님, 산신님 하던 걸 견하할매, 견하할매하고 부르게 됐고. 산과 마을의 생명력을 관장하던 견하할매는 몇천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점점 쇠약해졌어.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서는 깊고 긴 잠을 청해야만 했지. 어느 날,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한 할매는 마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다가 마지막 인사를 나눴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니까 경쾌하고 맑은 바람이 눈물을 시원하게 말려줬어. 할매의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목소리가 시누대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실려 왔어.
“나를 빼닮아 아름다운 아이들아. 너희가 서로를 귀히 여긴다면 나의 풍요로움과 사랑을 얻을 것이요, 짊어진 슬픔은 가벼워질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견하할매는 다시 긴 잠에 들었어. 그 뒤로 우리 후동리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씩, 할매를 기리기 위해서 산신제를 지내곤 하지. 아름이 니 작년에 산신제 했을 때 기억 나나? 제단 위에 시누대 올라가 있는 거 봤제? 거기에 바치는 시누대는 일 년 내내 시들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 있데이. 견하할매가 축복을 내려준다는 증거인 거라.
“…끝!”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나는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 채로 멍하니 누워 있었다. 내 머릿속은 견하할매의 마지막 말로 가득 찼다. 엄마가 눈앞에 손바닥을 살짝 흔들어보았다.
“엄마.”
“와?”
엄마가 내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지르면서 대꾸했다.
“자애로운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음….”
엄마는 짧게 생각을 마치곤,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해가, 다른 사람들한테 사랑을 베푸는 거지. 나를 가엽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가여이 여기면 된다.”
“우얘하는 건데?”
“딱히 정해진 방법 같은 건 없다. 때로는 마음을 다한 한 마디로 충분할 때도 있고 그런 거제….”
엄마는 다시금 내 이불을 꼭 여며주며 말했다.
“엄마랑 아빠가 밤마다 이렇게 아름이 이불을 덮어주잖아. 이것도 그런 것 중 하나인 거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나는 이불을 여민 후 다시 내 뺨에 얹은 엄마의 손가락을 살풋 잡았다. 그러자 엄마는 엄지로 내 여린 손을 살살 쓸었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서 ‘자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엄마의 손등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사랑해요, 엄마.”
평소 잘 하지 않던 말이라 시원하게 내뱉지는 못하고 조용히 웅얼거렸다. 엄마가 살짝 웃었다. 견하할매를 닮은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