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고 온 자리(1)

이미지 출처: Unsplash의Yun Cho

by 주이슬




태양만 바라보며 걷던 정서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손차양 아래로 맞은편에 서 있는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면발을 젓가락으로 쥐고 있는 큰 손이었다.

‘메밀면이다….’

드디어 봉평면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한 번쯤 와보고 싶었지만, 막상 도착했을 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까 봐 겁이 나던 동네였다. 어떤 이의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던 곳. 그 사람은 그리운 것이 생길 적이면 항상 본인의 고향을 찾는다고 말하곤 했다. 정서도 그리움 하나에 의존해 이끌리듯 여기에 도착했다. 이곳이라면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하루는 묵고 가야겠지.”

태양이 지는 방향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한 지 벌써 이 주 가까이 되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더 걸어야 한다면 걸을 작정이었지만 그래도 봉평까지 왔으니 오늘은, 늦어도 내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이 걸음의 끝이 어느 정도 보였으면 했다.

정서는 쭉 뻗어있는 남안교를 밟기 전, 동상 옆에 놓인 자그만 정자에 앉기로 했다. 짧지만 달콤한 휴식이었다. 자리에 털썩 앉은 뒤 매고 있던 배낭을 풀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흙먼지 따위로 배낭 앞면이 얼룩덜룩했다. 등판에는 땀 냄새가 배어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향….’

정서는 코를 킁킁거렸다. 땀 냄새 말고도 공기 중에 옅은 향이 퍼져있었다. ‘풀 냄새인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곡물 같기도 하고 거름 같기도 한 냄새였다. 그는 계속 후각에 집중하며 배낭 앞에 달린 작은 지퍼를 열었다. 동그란 손거울이 튀어나왔다. 바래고 헤져서 옥색인 걸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뒷면에는 언제 붙였는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조악한 캐릭터 스티커가 희미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서는 좌우로 고개를 돌려 누가 지나가고 있는 건 아닌지 동태를 살핀 후, 입술을 크게 벌렸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오른쪽 아랫입술을 눌렀다. 잇몸이 드러났다. 송곳니 뿌리 부근이 살짝 파여 있었다.

‘약간 시리긴 한데, 이게 무너진 건지 뭔지….’

정서는 혀로 송곳니를 살짝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거울을 뒤집어 내려놓은 뒤 페트병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의 물을 털어 마셨다. “양치 꼬박꼬박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물과 함께 목뒤로 넘어갔다.


남안교에 깔린 나무 덱을 밟을 때마다 경쾌하고 가벼운 소리가 났다. 난간 아래쪽에는 남안동천의 물줄기가 파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옆으론 길게 자란 풀들이 무성했고 저 멀리서는 아지랑이가 피었다.

“가을은 대체 언제 올 작정이려나….”

정서는 질식할 것만 같은 강변의 녹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걸었다. 목요일 한낮의 봉평면은 한가로웠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5분 정도 걷자, 메밀꽃밭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과 그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인 막국숫집들이 보였다. 두 발이 깔끔하게 조경된 공원 입구에 서서 잠깐동안 머뭇거렸다.

바로 메밀꽃밭으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몇 주간 강행군을 이어 나갔더니 피로가 상당히 누적된 상태였다. 일단 묵을만한 숙소가 있는지 한 번 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다행히도 바로 맞은편 길목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게스트 하우스가 한 채 보였다. 조심스럽게 출입구를 밀자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어깨를 스쳤고 뒤따라온 포근한 커피 냄새가 들뜬 마음을 살짝 눌렀다. 카운터 옆쪽 테이블에 젊은 여자와 중년의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여자는 양손으로 머그잔을 겨우 감싸는 중이었고 남자는 한 손으로도 컵을 거뜬히 감쌀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정서가 남자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이,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예약하셨나요?”

천천히 고개를 젓자, 여자는 “몇 박 머무실 거예요?”하고 묻더니, 곧장 1인실로 안내했다.

“메밀꽃 보러 오신 거죠?”

여자의 낮은 목소리가 복도에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네.” 나른해진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여자가 방 키를 건네며 짧은 유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차분히 배낭을 내려놓으며 방 안을 둘러보니 블라인드가 올라간 통창 밖으로 환하고 밝은 빛이 밀려 들어왔다.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정서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면서 푹신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시원한 공기에 긴장이 풀린 건지 피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닿은 몸은 부위별로 욱신거렸다. 옆 방에서부터 젊은 여자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정서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딱히 연락이 온 곳은 없었다. 화면을 끄자 검은 액정 위로 지친 눈매가 비췄다.

“후…….”

큰 한숨과 함께 몸이 매트리스 안으로 푹 꺼졌다.

“나도 참….”

한 번 무거워진 두 다리가 다시 가벼워지는 법을 모르는 것 같기에 잠시 낮잠을 청하기로 했다. 여기에서도 이 행군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또 며칠을 걸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옆방에서 다시 한번 까르르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정서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노르스름하게 익은 햇빛이 발치에 닿았다.

정서는 눈을 비빈 다음 기지개를 쭉 켜고 다리를 몇 번 주물럭거렸다. 확실히 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리곤 배낭에서 손거울을 꺼내 손에 꼭 쥔 채로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복도로 나섰다. 곧 멀지 않은 방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복도로 나왔다. 아까 들어오면서 봤던 손이 큰 남자였다. 부녀가 운영하는 곳인가 했는데, 오렌지빛과 회색이 섞인 등산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잠깐 머물다 가는 손님인 것 같기도 했다. 어깨 위로 짊어진 작은 가방 하나가 정서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남자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둘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먼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정서도 목례로 화답했다. 살짝 숙였던 고개를 위로 들던 순간, 무언가 정서의 머리를 스치는 듯했다. 어디선가 본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누구인지 선뜻 떠오르진 않았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입을 작게 벌리며 말을 건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그것뿐, 그는 곧 뒤를 돌아 게스트 하우스 밖으로 사라졌다.





장편에 조금 더 집중 하고자 예전에 썼던 글을 한동안 업로드하려 합니다.

Q. 날먹인가요?

A. 헐 넹 ㅋㅋ 죄송


「놓고 온 자리」는 이효석 작가의 「메밀 꽃 필 무렵」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입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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