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고 온 자리(2)

이미지 출처: Unsplash의Yun Cho

by 주이슬




탄탄하게 다져진 흙길이 작은 먼지를 일으켰다. 바람을 따라 천천히 흔들리는 메밀꽃을 바라보는 정서의 마음에도 작은 물결이 일었다. 가을만 되면 흐드러지게 핀다던 메밀꽃밭 풍경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햇빛이 닿는 곳곳마다 황금빛이 일었다. 정서가 앉은 정자 맞은편으로 한 가족이 손을 잡은 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빠!”하고 부르는 여자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귓속에 박혔다. 정서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때, 눈앞에 주황색과 회색이 섞인 등산복이 불쑥 나타났다.

“혼자 여행 왔나 봐요?”

“네….”

정서는 메밀꽃밭만 뚫어져라 보며 대꾸했다.

“젊은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혼자 올 생각을 했어요? 보통 가족들이랑 많이 오는데.”

“예전부터 와보고 싶던 곳이라서요.”

“왜요?”

심드렁함이 묻어난 정서의 말투 탓이었을까.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아는 사람 고향이에요.”

“그래요….”

남자는 더 이어 나갈 말을 고르는 듯, 몇 초간 아무런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마을 초입에서 맡았던 게 이 냄새였구나.’라고 생각하며 정서가 입을 뗐다.

“여기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에요, 그쵸.”

남자가 무어라 짧게 대꾸했지만, 정서의 귀엔 들려오지 않았다. 둔탁한 물감을 쌓아 올린 듯한 들판. 아빠도 이런 경치를 보며 자랐을까. 한가로이 흔들리는 메밀꽃밭,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9월 초 한낮의 공기, 미지근한 바람을 바라보던 정서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남자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 상태였다. 정서는 손에 쥐고 있던 손거울로 또다시 잇몸을 바라봤다. 그러다 거울 속의 본인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 지쳐 보이는 눈. 누군가를 선명히 닮은 두 눈이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거울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정말이지….”

정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뭘 어쩌자고 여길 온 건지, 멍청한 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정서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거칠게 잡아 뜯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시선은 여전히 뒤집어진 채로 정자에 놓여 있는 거울을 향해 있었다. 주먹으로 툭 치는 것처럼, 어딘가 뭉툭하게 끓어오르는 감각이 마음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붙잡지 좀 마, 이제!”

정서는 작게 소리쳤다. 입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곧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쳐들고 햇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얕게 고인 눈물이 빠르게 증발했다.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몇 번 들이키며 넓은 메밀꽃밭을 빙 둘러보았다. 하지만 시선은 곧바로 옥색 거울에 다시 머물렀다. 정서의 눈꺼풀과 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몇 분간 그 자리를 뜨지 못하던 그는 겨우 뒤를 돌아 거울을 남겨둔 채 숙소로 향했다. 발바닥이 끈끈했다.


숙소 앞에 다다른 정서는 출입문에 길게 늘어진 본인의 그림자를 바라봤다. 고개를 들어보니 해가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며칠간 정처 없이 꽁무니를 쫓던 그 태양이었다. 빛이 번지며 하늘이 적황빛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서는 이윽고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숙소 밖을 나섰다.

발걸음이 조급해졌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메밀꽃밭은 낮과 달리 인적이 드물었다. 거울을 놓고 왔던 정자 쪽으로 뛰어갔지만 누가 그새 주워간 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서는 무너져 내리듯 정자에 털썩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은 어느덧 푸른 빛으로 어두워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서 있는 집마다 창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메밀꽃밭은 갖가지 색을 받아들이느라 바쁘게 흔들리고 있었다. “쏴…….” 바람이 불며 두피를 시원하게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정서는 고개를 돌렸다.

“돌아왔네요?”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마주치는 남자였다. 솥뚜껑 같은 투박하고 큰 손이 눈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아까 놓고 간 거울을 쥔 채였다. 정서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건네받았다.

“꽤 오래된 물건인가 봐요. 어릴 때부터 들고 다녔나 본데.”

“네….”

정서는 조용히 웃었다. 거울 뒷면을 만지작거리자 맨들맨들한 표면이 느껴졌다.

“다시 올 거 같았어요. 그래서 아무 데도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지. 누가 가져가면 안 되니까, 내가 꼭 붙들고는.”

남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정서의 미간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계속 느껴지던 기시감. 입을 오므리며 가만히 앉아 있던 정서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옆자리를 살짝 두드리며 남자에게 권했다.

“다리 안 아프세요?”

남자가 어정쩡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로 옆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메밀밭은… 낮에는 화사하고 밤에는 눈부셔요.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절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죠.”

“여기 자주 오세요?”

“네, 뭐…. 여기 해마다 축제하는 거 알아요? 저는 매년 그 시기에 맞춰서 와요. 가족끼리도 한 번 같이 온 적 있거든요. 딸아이가 무척 좋아했는데,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그 뒤로는 왜 같이 안 오셨어요?”

“음…….”

남자는 한참 동안 낮고 약하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곧 입을 다물었다. 정서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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