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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표출은 어렵다.

#아이의감정표현 #불안감 #고립 #육아실수

by 지예


#감정교류

낮게 깔린 찬 기운이 옷 속을 파고드는 오후다. 가만히 서있으면 더 춥기에 열기를 뺏기지 않으려 발길에 의지해 몸을 이리저리 옮긴다. 현관이 열린다. 하원 하는 '너'를 기다리는데 이깟 추위는 방해되지 않는다는 듯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현관을 바라보고 선다. 줄지어 나오는 아이들 틈에 둘째 아이의 굳은 얼굴이 보인다. 평소 신발을 신으면서부터 조잘대던 아이가 말이 없다.


얼굴 표정만 봐도, 몸짓만 봐도 그날의 컨디션이 어떠했는지 읽힌다. 무난한 표정이라면 그냥 넘어가지만 살짝만 건드리면 눈물이 흐를 것 같을 땐 물어보게 된다. 아이에게 묻지 않으면 절대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

새로 드러낼 좋은 감정이 생길 때까지 덮으려고만 한다. 그러다 내가 잊기라도 하면 아이는 마음에 쌓아둘 수가 있어서 감정을 순환시키는데 신경을 곤두세운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오늘 표정은 이렇게 굳어있을까?"

"... 음... 사실은..."


아이의 말에 신중함이 눌러져 있다. 자기도 조금 지나면 잊어버릴 글자임에도 순간 알았다는 자부심에 우쭐하고 싶었나 보다. 친구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다. 그 친구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친구 자리에 다가가서 아는 척한 것이 화근이었다. 친하다 생각해서, 친해지고 싶어 선택한 행동인데 상처를 받았다. 곱지 못한 말을 듣고 돌아설 때의 그 당황스러움과 민망함에 고개를 떨구었을 거다.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물어 아이의 감정을 읽었고

그렇게 했을 때의 상대 친구의 상황도 가늠해 주었다.

그러고 적절히 우선해서 했어야 할 행동과 말도 일렀다.


아이는 이해를 했고 별다른 말없이 업히고 싶어 했다. 속상할 땐 나에게 안기거나 업혀있으면 마음이 풀린다고 한다. 오랜만에 내 등에 업혀 속상함을 달래며 집으로 왔다.


ⓒscottwebb by pixabay


#속상함 #불안

첫째 아이는 사교성에 큰 물음표를 달아본 적이 없다. 그냥 두어도 저절로 영양분 잘 섭취하며 건강히 자랐을 아이다. 밥 먹는 것 말고는 손 갈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둘째 아이는 전혀 새로운 육아를 하고 있다. 가장 큰 우려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혼자 노는 시간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여섯 살의 고립감이라고 하기엔 이르지만 아이는 자의적인 고립을 선택하고 있다. 벽돌집을 만들어 그 안에서 자동차 놀이를 하는데 상대는 없다. 자기 책상 위에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동물놀이를 하는데 역시 상대는 없다.


유치원 생활 2년 차에 이제야 조금 마음을 열었다. '친구'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놀이에 찾아와 주길 바란다. 그러나 공감해 주는 친구가 없어 속상해한다. 네가 먼저 다가가서 놀이를 청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말을 했을 때, 여러 번 거절당해서 기분이 나빴다며 더는 겪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함께 어울릴 듯했던 친구도 스쳐 지나가기만 해서 온전한 놀이를 해본 건 몇 번 없다. 혼자 하는 놀이가 차라리 속 편하다는 아이의 말은 엄마의 가슴을 쥐어뜯는다.


아이는 또래와 어울리는 즐거움을 만끽해 보지 못한 거다. 반 아이들과의 유대감 형성이 제대로 안 되어 있다. 코로나로 인해 개별 활동이 많아진 교육 과정 변화가 이유가 될까? 아직은 유의미한 '친구'라는 개념을

적용하기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집에서의 놀이 만족감이 전부여서는 안된다.


타인이 놀이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상황과 함께 어울리는 여러 가지 상황을 알게 하려고 유치원에 보낸 것인데 해답을 찾기가 어렵다. 첫째 아이가 혼자 있는 동생이 안쓰러우면 자신의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데려나간다. 그러면 누나들이 챙겨주면서 함께 어울렸다 온다.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두는 나이라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모두 너와 같을 수 없음을 계속 알려주는 일을 그 이해로 넘길 수 없다. 말, 행동, 상황, 감정, 성장 등 여러 가지를 빗대어 대화하면서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러하기에 모두가 존중받아야 해서 '너'만 중요하게 볼 수 없음을 알려준다.


#육아실수

나는 어디서든 말을 아끼려 하지만 아이를 두고 냉정함을 찾기란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잠깐 참았다가 사람들과 멀어졌을 때 물었어야 하는데 실수를 했다. 아이의 어두운 표정을 읽고서 유치원 현관에서 바로 물어보고 아이의 말에 친구 이름이 나오면서 아차 싶었다. 그 대상이 되는 친구 엄마가 바로 옆에 있었다. 아이의 속상함을 듣다가 실수를 더하지 않으려 내 자식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고 친구의 상황을 말해주기는 했다. 아이의 일이 어른 일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나야말로 나를 계속 고립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고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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