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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Jul 08. 2022

애미 맘을 저절로 알아주는 기적은 없다.

아이들은 초능력자가 아니다.

한 학기 내내 큰 아이의 행동을 관찰했다. 관찰만 했으랴.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은지 알려주었고 대화를 했다. 그래 분명 아이와 대화를 했다. 나만의 착각이었다. 야단칠 때는 야단을 쳤고 지적이 필요할 땐 지적을 했다.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기본적인 생활 습관 형성에 집중했다. 그러나 결과는 진창에 빠지기 직전이다. 시간 만수르인 아이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깊어진다. 비례해서 아이와 내 얼굴은 서서히 굳어간다.


아이는 내 말을 마음으로 주워 담지 않고 귓등으로 튕겨냈으니 나는 잔소리 대마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 영광을 누려야 하나 심히 고민했다. 같이 진창에 빠지기 전에 지푸라기라도 더듬어 잡아야 한다.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서 얻은 허탈함과 허무함, 엄마라면 한 번쯤 머리 싸매고 '내가 뭣하러 이러고 사나' 병을 앓았다. 큰 아이는 이제 사춘기 초입인데 아찔하다.


아이들 보낸 아침, 고요한 침묵의 시간에 큰 아이를 위해 편지를 썼다. 수없이 드러냈던 마음을 화로 다스리지 않으려 솔직한 마음을 글자 하나하나에 눌렀다. 쓴 글을 또 읽고 읽으며 이렇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지 고민했고 줄까 말까 망설이며 편지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내가 했던 무언의 행동들을 아이가 눈치채고 알아주길 바랬던 순간들이 어리석었음을 토로했다. 큰 아이는 세상은 아름답다는 천성이라 다소 둔한 눈치를 가진 존재였는데 말이다.


편지 쓰는 고민으로 미뤘던 살림을 시작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또 큰 아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다시 내 어릴 적 한 구석을 들췄다. 엄마의 한숨과 나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어찌할까 몰라 쭈뼛거리던 상황이 환해졌다. 내게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말해주지 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을까. 엄마가 뱉은 한 숨 속의 무거움을 끼얹기만 했지 내려놓을 기회를 왜 좋게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엄마는 엄한 빨래에 화풀이하며 꾹꾹 누르다 더 압축되지 못한 화를 순간 터뜨리기도 했다. 삐뚤어졌을 당시의 엄마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이 되기까지 내 엄마는 내게 마음을 열었던가.


설거지하다 말고 팔을 늘어뜨리며 한 숨을 쉬었다. 어제부터 고민했던 일이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책상 위에 써 놓은 편지, 하교하고 돌아온 아이의 반응을 먼저 살펴 이후를 생각하기로 했다. 동기를 유발하고 유의미한 자극이 될 만큼의 대화로 어떻게든 긍정적인 피드백을 이끌 과제를 떠안았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기적은 둔감한 아이일수록 부모의 속만 긁어댄다. 의도하지 않은 아이의 행동일지라도 부모만 애가 타는 거다. '내가 뭣하러 이러고 사나'병이 깊어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아이가 내 의도를 저절로 알아차리면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텔레파시가 통하는 건 탯줄 끊고 나오며 진작에 휘발됐다.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아이와의 연결점이자 통하는 점은 닮은 외적 모습뿐이다. 대단한 것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돌아다니며 어질러 놓았던 주변 정리와 그날의 복습, 접어놓은 빨래 가져다 넣기, 할 일 다 하면 얼마든 자유시간을 가지는 기본 틀이 잡히지가 않는다. 서로가 오해를 쌓아 마음에 금이 가지 않으려면 건강한 대화가 필요하다.  안다 너무 잘 안다. 아는데 무서울 만큼 어렵다. 나를 좀 낮추고 아이를 더 끌어안아야 하는 너그러움을 장착하고  아이 눈치 좀 봐야겠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마음에 천둥번개가 내려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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