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배운 '엄지 척'의 철학

나를 토닥이는 시간이 아이에게 스며들 때

by 지예

오후의 볕이 길게 늘어지는 거실 한편, 나는 작은 번호들이 빼곡히 적힌 캔버스 앞에 앉아 있다. 요즘 나의 일상은 '피포 페인팅(DIY Painting)'이라 불리는 수행 아닌 수행으로 채워진다. 번호에 맞는 물감을 찾아 붓 끝에 묻히고, 좁다란 칸을 정성껏 메우는 일이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격리되어 오로지 색과 나만이 대화하는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방학을 맞아 제 세상인 양 놀던 둘째 아이가 심심함이 묻어나는 발걸음으로 다가와 곁에 선다. 한참 동안 내가 붓을 놀리는 모양새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가 툭 던지듯 묻는다.


"엄마, 이게 재밌어?"

"응, 조금 지루하긴 해도 분명히 재밌어."

"이거 다 완성할 거야?"

"그럼. 시작을 했으니까 끝을 내야겠지."

내 대답을 듣고 아이는 엄지를 척 치켜세우며 한마디를 보탠다.

"오~ 엄마, 그 자세 아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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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칭찬이었다. 내가 선택한 취미이기에 ‘하는 행위’ 자체를 당연시해 왔던 나에게, 둘째가 던진 이 의젓한 격려는 당혹스러우면서도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이게 과연 칭찬받을 일인가 싶어 얼떨떨하면서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기분 좋은 열기는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고맙다고, 네 칭찬 덕분에 이 지루함이 다시 즐거워졌다며 그 행복함을 있는 그대로 아이에게 돌려주었다.


아이들은 가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어휘로 어른을 깨우친다. 둔감한 나는 아이들의 폭풍 성장기를 매번 뒤늦게 알아차리곤 한다. 어느새 달라져 있는 말투, 훌쩍 자란 키를 보며 그제야 '아, 네가 이만큼이나 왔구나' 하며 감탄하는 서툰 엄마다. 하지만 이번 둘째 아이의 칭찬은 단순한 어휘의 습득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건넸던 위로의 복사본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부모로서, 고단한 생활인으로서 지칠 때마다 나는 남의 시선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팔을 토닥인다. "오늘도 애썼어", "시작한 일을 포기하지 않다니 멋지다"라고 혼잣말을 건넨다. 얼마 전부터는 '이런 나 자신, 칭찬해'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 부적처럼 새겨두었다. 나의 약한 자존감을 스스로 튼튼히 하려 했던 그 사소한 몸짓을, 불안이 많던 둘째 아이가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심리학과 뇌과학은 부모의 이런 행동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한다. 우리 뇌에는 타인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마치 자신이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반응하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 존재한다. 부모가 자신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은 아이의 뇌에 그대로 투사된다. 내가 나를 향해 보낸 작은 칭찬의 신호들은, 아이가 자아 존중감을 학습하는 소중한 모델링이 되어주었다.


ChatGPT Image 2026년 2월 19일 오후 11_05_33.png by ChatGPT


또한 지루한 페인팅 과정을 묵묵히 이어가는 '자세'를 긍정해 준 아이의 시선은 뇌과학자 캐럴 드웩이 말한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과 맞닿아 있다. 결과물인 '그림'보다 완성해 가는 '태도'에 집중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인지적 성취보다 과정의 고귀함을 먼저 배운 셈이다.


자존감과 긍정성이 유독 높은 첫째 아이를 보며 늘 대견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둘째 아이의 성장은 늘 마음의 숙제이다. 하지만 나는 둘째 아이의 성장을 조급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은 시간의 기다림이다. 내가 나를 토닥였던 온기가 아이에게 스며들어 '자세가 좋다'는 의젓한 칭찬으로 돌아왔듯, 나의 꾸준한 자기 긍정을 위한 노력은 둘째의 마음속에도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아이는 스스로를 응원하는 힘을 키워가고 있음을 느낀다.


칭찬은 아이들만 고픈 것이 아니다. 어른에게도, 특히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지워가는 이들에게도 칭찬은 반드시 필요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건강하게 순환하는 칭찬의 구조에는 반드시 '셀프 칭찬'이 포함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충분히 사랑해야 아이에게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법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캔버스의 빈칸을 채운다. 조금은 번지고 서툰 색칠일지라도, 붓을 내려놓을 때 스스로를 토닥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의 이 작은 손짓이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자존감이라는 울창한 숲으로 자라날 것을 믿기에, 나는 오늘도 기꺼이 나를 칭찬한다.


"브런치에 글 쓰는 이 자세, 아주 좋아."




표지이미지 : cottonbro studio by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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