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새해, 실내화를 빨며 시작하는 3월

by 지예

매년 1월 1일이면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를 넘긴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1월의 겨울은 지난 12월의 긴 꼬리 같다. 매서운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작년의 피로와 미련을 채 떨쳐내지 못한 상태로 떠밀리듯 시작하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우리에게 1월과 2월은 새로운 삶을 살기보다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올해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예열하는 긴 워밍업의 시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진짜 '시작'의 기운은 생명이 움트는 3월과 함께 온다. 오랜 시간 학생으로, 또 학부모로 살아오며 몸에 깊게 밴 '개학'이라는 리듬 덕분이다. 3월의 햇살에는 겨울의 완고함을 녹이는 온기와 함께,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도 좋다는 너그러운 허락이 담겨 있다. 1월에 세웠다 희미해진 계획들을 다시 꺼내어 뽀얀 먼지를 털어내고, 부족한 점을 수정하고, 다시 씩씩하게 써 내려갈 수 있는 절호의 두 번째 기회. 3월은 우리에게 찾아온 또 한 번의 다정한 새해다.


Gemini_Generated_Image_vmlzlfvmlzlfvmlz.png Created with Google Gemini


집안의 풍경부터 생동감 있게 달라진다.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방식으로 다가올 '개학'을 정성껏 맞이한다. 초등학생 아이는 방학 숙제를 점검하고, 가방과 신발주머니의 이름표에 학년과 반을 수정해서 기입한다. 아이의 부산스러운 소리는 고요했던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중학생 아이는 빳빳한 새 교과서의 첫 장을 넘기며 정갈한 문구류를 챙긴다. 한 학년 높아진 자신의 무게를 실감하는 아이의 뒷모습에는 제법 진지한 설렘이 서려 있다. 그 설렘은 아마 생일 선물로 미리 받게 된 새 가방 덕분인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오는 의식 같은 시간, '실내화 빨기'다. 신발장 한구석에서 묵묵히 겨울을 났던 꾀죄죄한 실내화를 꺼내온 아이들이 화장실에 솔을 들고 쪼그려 앉는다. 슥슥, 비누 거품이 일고 해묵은 때가 씻겨 나가는 소리가 욕실 바닥을 타고 집안 구석구석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마치 "이제 정말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준비됐어요"라고 외치는 경쾌한 신호탄 같다. 햇볕 아래 나란히 누워 하얗게 빛을 내며 몸을 말리는 실내화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속의 묵은 감정들과 나태함을 털어낸다.


Gemini_Generated_Image_62k5du62k5du62k5.png Created with Google Gemini


나의 3월도 아이들 못지않게 뜨겁고 분주하다.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던 오프라인 강좌를 신청하고, KMOOC에서 평소 눈여겨보던 강의의 개강일을 달력에 꾹꾹 눌러 표시해 둔다. 사실 이번 3월에는 배움을 향한 내 의지를 확인하려는 듯, 예상치 못한 시험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첫 출강 요청일이 내가 간절히 기다려온 오프라인 수업의 수강일과 겹쳐버린 것이다.


잠시 현실적인 고민이 스쳤다. 당장의 수입과 사회적 커리어를 생각하면 출강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지만, 나는 주저 없이 강의 요청을 거절했다. 통장에 찍힐 숫자보다 내 영혼을 채울 배움의 가치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까운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내게 더 절실한 것은 당장의 경제적 보상보다 '장기적인 삶의 변화'를 위한 단단한 기초였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확고한 신호이자, 이번 3월만큼은 타인의 기대가 아닌 나의 성장을 위해 제대로 채워보겠다는 의지의 증명이다.


iqbalstock-muslim-7520627_640.jpg Image by Iqbal Nuril Anwar from Pixabay


누군가는 묻는다. "그 나이에 뭘 그렇게까지 새로 배우려 하느냐"라고. 하지만 나는 나이 들어감을 외면하거나 잊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 듦이 그저 낡아짐이나 쇠락이 되지 않도록, 잘 익은 가을 열매처럼 향기롭게 성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간 위를 걷는 것이다. 성숙이란 가만히 앉아 세월을 기다린다고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눈앞의 이익을 과감히 뒤로하고 자신을 새로운 배움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 용기, 그 부단한 움직임 끝에 비로소 깃드는 훈장 같은 것이라 믿는다.


아이들의 깨끗해진 실내화처럼, 나의 3월도 새하얗고 단정하게 시작된다. 삶의 활기로 가득 채워질 앞으로의 10개월. 거창한 성공이나 화려한 성취보다는, 매일 조금씩 내면의 농도가 짙어지고 삶의 결이 고와지는 나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표지 이미지 : Created with Google Gemini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들에게 배운 '엄지 척'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