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을밭을 아이와 손잡고 거닐었다. 촉촉이 젖은 낙엽 곁에 쪼그려 앉았다. 나무를 한 번 올려다보고 땅을 내려다 보기를 반복하던 아이가 가을에게 인사한다.
"나무 안녕? 엄마, 단풍잎이 너무나 예쁘지 않아? 왜 이렇게 많이 떨어졌지? 아하! 이제 겨울 준비를 하는가 보네. 근데 이거 너무 예쁘다. 엄마! 단풍을 집에 가져가면 우리 집도 가을이 되겠다. 오래오래." 아이의 청에 응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낙엽을 같이 고르고 손에 담으며 머물렀다. 사람을 피해 아이와 하는 가벼운 산책만으로도 이러저러한 재미가 더해지면서, 가을을 예쁘게 마무리할 듯 평온한 몇 주를 보냈다.
아이와 함께 데려온 가을 ⓒ지예
이사를 와서 맞이하는 두 번째 가을이 여전히 낯설다. 찬바람이 스며드는 이맘때면 내가 쌓아 올린 삶을 하나씩 긁어내는 버릇이 있다. 다 나이 탓이려니.
두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아무 대가 없이 이렇게 흡수해도 되는 걸까. 내가 그들의 엄마라는 이유로 조건 없이 마음과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안기는 걸 온전히 해도 되는 걸까. 심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도 되는 걸까.
이 아주 기본적인 물음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진다. 처음에는 몰라서, 두려워서 그랬다. 여전히 무지하지만 내게 주어진 두 아이의 삶에 대한 예의를 다한다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른다. 계절을 탄다는 표현이 맞겠다.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특히 마음이 시려지는 계절 변화는 한 해를 정리하는 기분이 들어 더 무겁다. 무거운 만큼 잘해야 하는데 아직 빈틈 많은 모지리 상태다.
아이는 일찍 깨어 종종거리며 다가와 품에 쏙 들어왔다. 예민함이 강한 만큼 불안도 함께 하는 아이다. 아이의 기분을 살펴 아침을 밝히려는 노력에 소홀함이 있으면 바로 반응이 온다. 나의 모지리 짓은 아침에 툭 튀어나온다.
서리 내린 잔디를 밟으며 대화하며 걷다가 얼어버린 흙 밭에서 꿈쩍도 않는 모래알들을 같이 신기하게 보고 또 이야기 나누다가 유치원으로 들어섰다. 엄마를 잃어버리기 싫다는 아이를 떼어놓고 나오며 아이가 보인 눈물에 마음이 따가워서 따라 울었다. 둘째의 등원 눈물은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시린 바람보다 날카로웠다.
엄마와 헤어지는 줄로만 알았고 엄마를 잃어버리는 줄 알아서 등을 보이는 걸 극도로 꺼리던 아이다. 말과 행동의 거부에서 행동은 잦아들고 이제는 말로만 그렇다 할 뿐 이내 잊고 잘 지내고 올 만큼 적응했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그런 아이의 눈이 유독 많이 흔들렸다. 나는 무엇을 놓친 걸까.
유치원을 잊을 만큼 일요일의 신남이 지나쳤다. 조절 실패다. 내 감정을 솔 음계에 걸쳐야 했는데 미치지 못했다. 아이의 상태는 살폈는지 생각해봤다. 아이는 인사를 싫어한다. 교문에서 등원을 지도해주시는 선생님께 하기 싫어하는 인사를 내 마음대로 강요했다. 왜 인사를 안 하냐는 말이 나왔다. 아이는 억울한 핀잔으로 느꼈으리라. 내 몸은 하나인데 마음을 여러 개로 나누어야 하는 버거움에 시달리는 상태인가. 집에서 혼자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첫째 아이에게 마음이 점점 더 기울던 참이었는데 들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