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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Jun Nov 29. 2021

할머니, 시장, ATM UX writing

신한은행 시니어 맞춤 ATM UI(1)

사건의 발단: 저는 평소부터 키오스크의 구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지난 주에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평소 전 세계 키오스크의 구림에 관심이 많던 저로서는 아주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UX writer로서 보편적인 금융 용어를 굳이 고유어로 쉽게 풀어쓴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서 써보기로 합니다. 제가 이번 달에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이대로 일을 더 하면 근무시간이 과하게 초과될, 그야말로 위험한 수준이거든요. 화끈하게 반차를 쓰기로 합니다.

(나란 여자 반차 쓰고 ATM 써보러 가는 여자... 반차, 내 작고 소듕한 반차...)


기사에 '신림동 등 5개 고객중심 영업점에 우선 시행'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에 일단 5개 지점 중 가까운 곳이 어딘지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신한은행 콜센터에 전화를 했습니다.


나: 저기, 신한은행에서 시니어 전용 ATM을 우선 적용했다는 기사를 봤는데요, 혹시 어느 지점인지 알 수 있을까요?
상담사님: (짧은 정적)...
나: (다급하게 변명조로) 아니, 그니까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제가 관심이 좀 있어서요, 그냥 좀 써보고 싶어서요...
상담사님:... 아... 네... 그럼, 음... ATM 부서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진짜 콜센터 명장님들은 그저 빛입니다.

미친 젊은 여자가 시니어 ATM을 쓰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도 친절하게 받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ATM 부서로 순조롭게 연결되어 친절하게 지점을 안내받았습니다. 신림동, 난곡, 오류동, 신내동, 하계동 지점. 모두 서울 북쪽과 남쪽의 대표적 베드타운에 있군요. 경기도에 사는 저는 그래도 가장 가까운 신림동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학교 다닐 때 매일 지나다니던 신사리(신림사거리)도 오랜만에 가보고 싶었어요.


사건의 전개: 뜻밖의 모험, 안 뜻밖의 화면


빨간 버스를 타고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신림역에 내렸습니다. 잘 아는 삼모 스포렉스 근처 동부아파트 상가에 있다니 길 잃을 염려도 없고, 못 찾아갈 걱정도 없습니다. 느긋하게 추위를 뚫고 걸어갑니다. 신사리의 가게들은 많이 바뀌었는데 어째 분위기는 침침한 옛 그 느낌 그대로네요.

 ATM이고 뭐고 그냥 양지순대타운에나 가서 백순대를 먹고 싶지만 혼자라서 참습니다.



신림역 3번 출구에서 동부아파트로 직진. 안 없어진 가게는 이 오장동 흥남집 정도. 와, 회냉면이 이제 만 이천 원이네. 진짜 라떼는 말이야... 냉면이 얼마였...아..아닙니다.


빙글빙글 아파트 상가를 돌아 신림역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지점은 지금 리모델링 중이고 상가 안쪽 ATM 기만 쓸 수 있었어요.


가장 대표적인 돈 찾기(출금) 플로우를 찍어봤습니다. 입금, 출금, 송금, 통장 정리 모두 예상하시는 플로우일 것입니다. 동영상을 캡처한 거라서 잘 안보이실 수 있지만 대략적으로 이런 흐름이니까 화면 구성, 글자 크기, 텍스트만 슬쩍 확인해 주세요.


이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화면을 고르시오. 정답은 이 글의 후반부에 밝힐 예정


제 통장 잔고는 부끄러우니까 가렸습니다. 들여다보셔도 소용없어요.


엄청 새로운 것처럼 보이시나요? 근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ATM에서 이런 큰 글씨, 심플한 구성을 제공하고 있답니다. 다음은 KB 국민은행 AMT입니다.


심지어 더 짧아요. 잔고도 안 보여줘, 명세표도 묻는 스텝도 없어! 아, 마지막 3장에 나온 검은 물체는 제 배가 아니고 가방입니다. 오해 마셔요.


사건의 핵심 1: 주 사용자를 생각해서 메인 플로우를 바꾼다.


요컨대 이 시니어 기능은 기존 ATM들에 있었던 것이고, 이번에 새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신한은행 시니어 전용 ATM은 단 두 가지를 새로 시도해 본 것이죠.


 각 ATM의 첫 화면의 차이. 디폴트 설정은 주 사용자에 대한 제품의 시각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주 사용자를 생각해서 화면 구성, 특히 첫 화면의 순서를 뒤집은 것입니다.

기존 ATM은 시력도 짱짱하고, 금융 거래도 자주 꽤 하고 손가락도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잘못 터치하는 일도 없고, 창구에서 직원을 만나고 싶지도, 만날 시간도 없어서 ATM에서 많은 일을 해결하고 싶은 '일반 사용자'(이 '일반 사용자'이란 말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일단 넘어갑시다)를 타깃으로 해서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시력자들이나, 노인, 어린이 등 금융 서비스를 이용해 본 적이 없던 초보 사용자들에게는 이런 ATM 사용이 어려웠기 때문에 간편 거래나, 화면 확대 서비스를 추가로 ATM 화면에 탑재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간편 거래로 이어지는 버튼'이 다글다글한 첫 화면에 있기 때문에 정작 그 기능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 버튼을 찾지 못했던 것이지요(레이블도 간편 거래보다는 조금 더 직관적으로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신한은행 시니어 전용 ATM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니어 고객이 주 타깃 유저인 지점에서는 아예 첫 화면을 간편 거래용 화면으로 바꾸어 버리고, 메인 과업을 이 단순 업무 4개를 중심으로 정의했네요.


신문 기사를 보면 시범 운영으로 선정된 5개 지점인 신림동, 난곡, 오류동, 신내동, 하계동 지점의 주 사용자는 어르신들이고 창구 업무의 75% 이상이 입출금, 송금, 통장 정리와 같은 단순 업무라고 합니다.

실제로 신한은행 신림동점 맞은편에는 신림동 최대 규모인 신원시장이 있습니다. 신림동 저쪽 끝 산꼭대기에서부터 어르신들이 마을버스를 타고 이 신원시장으로 장을 보러 오시곤 합니다. 재래시장에선 아직도 현금이 주로 사용되니 어르신들은 현금 삼만 원, 오만 원을 뽑아야 장을 보실 수 있겠지요.

그뿐인가요, 그 현금을 받고 물건을 판 상인들 역시 입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장 어귀에 있는 신림동 지점은 필연적으로 고연령 사용자와 입출금, 송금 등의 단순 업무에 기민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네, 그래요. 그게 다입니다. 명확하게 메인 유저의 니즈를 잡아내고, 타게팅해서 플로우의 순서를 살짝 바꾼 것만으로 나름의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짝짝짝.


사건의 핵심 2: 사용자의 긴장감을 이해하고, 일단 한번 쉽게 써본다.


신한은행 시니어 전용 ATM의 새로운 시도 그 두 번째는 사용자의 사용 맥락을 고려하여 기존 금융 용어를 끝까지 풀어서 써본 것입니다. 첫 화면의 레이블이 자못 새롭습니다.


메인 메뉴의 비교. 만든 말과 있던 말


신한
돈 찾기 - 돈 넣기 - 돈 보내기- 통장 정리

KB
예금출금 - 입금 - 계좌 송금 - 통장정리


보시다시피 신한 쪽에서 기초적인 금융 용어를 더 풀어서 새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 풀어쓰기에 대해서는 온라인 상에서도 좋다 안 좋다 의견이 갈렸고, 링크드인으로 업계에 계시는 분께서 부족한 제 의견을 물어보셨어요. UX writer로서 소견을 밝히자면, 의도와 시도는 좋았지만 고민해야 할 지점이 남아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일단 한자어로 된 금융 용어를 아주 쉽게 고유어로 순화하였는데 이렇게 풀어쓴 방향 자체는 적절했습니다.

일전에 쉽게 쓰는 게 UX writing이 아니다에서 한자어 금융 용어를 풀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깐 설명을 드렸지만, 오늘 다시 한번 체크해야 할 부분들을 짚어 보겠습니다.

내가 이 바닥에서 쓰는 이 용어를 순화해야겠다, 한번 쉽게 써봐야겠다 생각이 들면 아래 사항을 먼저 확인해 주세요.


이 용어가 정말 어려운가?

실제 이 어휘의 난이도는 어느 정도이며 보편적인 언중과 타깃 유저(타게팅된 그룹이 있다면) 각각에게 얼마나 어렵게 느껴지는지(게시판에서 말이 어렵다고 투덜대는 말을 다 믿지 맙시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그 용어를 알게 되면 또 엄청 보수적으로 돌변함. 한자어라고 다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점 잊지 말기)


얼마나 중요한 용어인가?

우리 서비스 전반에 자주 등장하는 핵심 용어는 아닌지, 기존 용어와 바꾼 용어가 다른 화면에 섞여서 표시될 가능성은 없는지, 뒤쪽으로 이어지는 플로우에 이 용어가 계속 영향을 미치는지, 이 용어가 업계 보편에서 사용되고 있어서 바꾸기 어려운 확정적 자곤은 아닌지(업계에서 나만 왕따 되는 건 아닌지)


이 용어를 UI 상에서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가?

용어를 바꾸지 않고 온보딩부터 첫 화면, 실제 태스크 진입까지 이르는 여정에서 사용자에게 이 용어를 설명하거나 자연스럽게 풀어서 의미를 이해시킬 가능성은 없는지(어휘 학습의 여지는 없는지)


이 용어를 바꿔서 표기했을 때 사용자에게 손해는 없고 이익만 있는가?

용어를 풀어서 서술했을 때 법적인 이슈에 휘말릴 위험은 없는지, 용어에 이미 익숙한 기존 사용자의 혼란을 불러와서 오히려 손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이 용어를 제대로 바꿀 수 있을까?

바꾸려는 용어가 하위어가 쉬운 상위어로 제대로 치환될 수 있는지, 엉뚱하게 옆으로 유의어(임에도 실상 다른 의미를 가진 말)로 바뀌는 것은 아닌지


요컨대 하나 바꾸려면 꽤 미래를 생각하고 뒷일을 걱정하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냥 바꿨다가 나중에 여러 명에게 석고대죄하고 롤백하면 진짜 돌부처 피눈물 콸콸콸입니다.(롤백해본 사람 손 드세요. 저요) 일전에 모 금융서비스의 주식 매도/매수를 주식 판매하기/구매하기로 바꾼 것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말씀드렸던 것도 이런 부분들 때문이에요.


그럼 이런 면에서 볼 때 신한은행 시니어 ATM의 UI text는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요?


....


어중간한 데에서 끊어서 죄송하지만 분량이 많아서 둘로 나눠서 갑니다. 이어지는 글은 곧 올릴게요.



오늘의 요약


시니어 사용자를 위해서는 큰 글씨, 단순한 화면 구성이 필요합니다. 신한은행 시니어 ATM UI의 경우 구성 자체는 기존 ATM 간편 거래와 큰 차이가 없지만, 작고 복잡한 첫 화면을 큼직한 4분할 구성으로 호쾌하게 나눠서 제공했습니다. 이는 메인 타깃 유저가 시니어임을 파악하고 메인 유저의 사용 행태를 중심으로 첫 화면을 바꿔본, 아주 간단한 발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역적 특수성과 사용 맥락을 고려한 결과인 것이지요.

용어를 쉽게 풀어쓸 것인가, 같은 개념에 대해 다르게 지칭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는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용어의 난이도와 중요성, 플로우 내의 영향도, UI 내 용어 학습의 여지, 바꿨을 때의 손익, 동일한 의미로 치환 가능한지의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서 결정해야 합니다. 쉽게 생각했다가 나중에 롤백하면 쑥대머리, 귀신형용... 괴롭고 미안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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