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UX Writing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 Jun Aug 03. 2017

카카오뱅크의 레이블(2)

사용자가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지난 글에 느낌표 하나로 너무 길어져서 이렇게 질질 끌다가는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쓰고 싶은 것을 안 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Good

금융 앱에서 내 이름을 바꿀 수 있다. 금융실명제인데도.


카카오 뱅크에 가입하면서 충격받은 포인트는 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내 이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맙소사. 은행 앱인데.

카카오톡 아이디로 가입을 시작하연락처, 휴대폰 인증, 신분증 확인을 쫘라라~ 스르륵 ~해나가니까 마지막에 도착한 메인 화면에서 내 카카오톡 대화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뱅킹을 시작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름을 바꿀 수도 있어...


그래서 저는전냥냥 고객님이 되었습니다.


시중 은행 창구에 가서 '저 계좌 개설할 건데요, 통장 이름은 전냥냥으로 해주세요.'라고 하면 은행원님이 뭐라고 하실까.

... 너님 돌았나.


영삼이 형이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한 이후 금융이  뭐가 뭔지 모르는 나 같은 파이낸스 베이비, 그러니까 돈의 ㄷ자나 금융의 ㄱ자도 모르는 일반인들도 이런 것은 알게 되었다.

금융 관련 업무를 하려면 각 세우고, 웃음기 지우고, 허리 펴고, 정색하고, 이 꽉 깨물고 은행에 가야한다는 것.

공문서에 저장되어 있는, 오로지 주민번호로 증명될 수 있는, 못나고 무능력한 '본인'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

차가운 자본의 세계에서는 실명이 아닌 나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카카오 뱅크가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선언한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 그대로를 우리 고객으로 만나겠다고.


이건 좀 놀라운 일이다.

(온라인과 SNS 상의 자아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지만) 온라인 상의 자아는 대부분 소프트한 영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카카오 뱅크는 카카오 톡이라는 SNS의 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견고한 금융의 영역으로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첫 페이지에 심었다.
 분명 시스템 깊은 곳의 핵심 task에서는(대출, 세금, 본인 식별, 보안, 금융 범죄... 으응?) 주민등록번호가 사용자를 인식하는 표식으로 작동하겠지만, 적어도 서비 표면에서는, 서비스가 사용자를 처음 부르는 그 지점에서는, 고객 자신이 정의한 자아를 인정하고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카카오 뱅크의 뿌리가 카카오 톡이라는 점, 그들이 온라인 생태계의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객이 원하는 '그 이름'을 불러주기로 결정했다는 점은 정말 대단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Labeling system에서 사용자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정말 중요하다.

사용자와 서비스의 관계가 정립되는 순간 톤과 서술 형식, Label의 부피, 태도, 정보 제공량까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를 때 모든 것이 정립된다.


Bad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음수율의 민족


아니, 이건 까긴 좀 그런데, 나도 겪은 고민이라서 안 쓸 수가 다.

금융 앱 레이블을 쓸 때 가장 곤란한 지점은 이런 것이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네이버에서 찾아보게 만드는 겁내 어려운 금융 용어를,

법적인 이슈 안 생기게

막 중학교 졸업한 학생도 알아먹게

대부분 한자어인 원래의 금용 용어와 동일한 뜻으로

쉽게 풀어쓴다고 해서 북한 문화어처럼 안 보이게

공간이 좁은데 거기에 다 처넣을 수 있게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게 누구에게는 별거 아닌 이슈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UX writer로서는 나름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문제이다.
특히 공간이 좁은데 다 처넣을 수 있게 쓰려면 미리 준비한 Label guideline을 제 손으로 부수면서 가이드 파괴를 자행해야 할 수도 있다.

아이스베어 가이드 파괴자 싫다.


카카오 뱅크의 메인 페이지에서 계좌 설정 아이콘을 터치하면 나오는 다음 바텀 시트를 보자.


마마 소녀 2.2조 라임을 지키지 못했나이다.

 


참고로 카카오 뱅크는 한글 맞춤법 규정에 따라 단어마다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단어는 독립적으로 쓰이는 말의 단위이기 때문에, 글을 단어를 단위로 하여 띄어 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후략)...
-한글 맞춤법 규정




계좌설정

  계좌 이름 변경

  계좌 색상 변경

  계좌번호 복사 


뭐가 이상하죠? 여러분 뭐가 이상합니까?

어쩐지 계좌번호를 띄어 쓰고 싶지 않습니까? '계좌 번호' 이렇게.

하지만 막상 띄어 쓰면 어떤가요?

어색하죠. 어색해... 어색하다...(어색해야 정상입니다.)


이것은 '계좌번호'가 관용적으로 4음절로 발음하는 금융 자곤(jargon)이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세계에서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영역을 앱으로 구현할 때에는 반드시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jargon을 쓰게 되므로 이런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띄어쓰기 안 하고 그냥 놓아두자니... 위의 메뉴 2개랑 나란히 있을 때 어쩐지 띄어쓰기 실수한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사실 답은 없지만 일단 메뉴의 상위 뎁스 레이블부터 다시 보는 게 좋겠다.


땡땡땡 메뉴 설정 아이콘을 눌러서 나온 바텀시트 타이틀은 '계좌설정'이다. 문제는 이 메뉴 설정 아이콘이 존재하는 영역이 'xxx님의 통장' 영역이라는 것. 통장과 계좌를 섞어서 쓴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만 간단하게 이렇게 바꿔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장 설정

  통장 이름 변경

  통장 색상 변경

  계좌번호 복사


이름과 색상 모두 통장에 관련된 내용이므로 대상을 통장으로 변경하고 맨 마지막 계좌번호는 jargon을 살려서 그대로 둔다. 여기에 레이블 작성 원칙 중 하나인 간결성(conciseness)을 살려보면 아래와 같이 줄일 수 있다.


통장 설정

  이름 변경

  색상 변경

  계좌번호 복사


계좌, 계좌, 계좌, 계좌.
병렬적,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메뉴명을 이렇게 동일 어휘로 시작하면 Legibility, Readability, Comprehension이 모두 떨어지게 된다. 첫 어휘를 반복한다는 것은 '나는 그만큼의 정보를 포기하겠다' 또는' 변별력이 낮아지는 것을 (무엇때문인지 몰라도) 감수하겠다'는 의미이다.

나열되어 있는 메뉴명을 지을 때에는 변별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사용자는 레이블이 비슷하게 보이면 그에 대한 판단을 금방 포기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카카오 뱅크 레이블은 전반적으로 참 잘 썼다.

일단 레이블의 양이 많지 않고 자곤을 최소화하면서도 반드시 표기해야 할 때에는 충실히 반영하려고 노력한 것이 보인다. 다만 공간이 좁다고 생각했는지 어절 간 띄어쓰기가 가능한데도 일부러 붙여 쓰기 한 레이블이 좀 있는 편.

사실 카카오 뱅크 앱은 다른 금융 앱에 비해서 정말 UI에 여백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탭이나 버튼이 아닌 이상 단어별로 띄어쓰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띄어쓰기를 충실히 하면 이해도와 가독성이 크게 높아진다.


아니 뭐... 워낙 서비스가 좋으니까 이따위 무시해도 잘되겠지만...


아이고. 이게 뭐라고 또 이렇게 길게 썼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