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맛있는 중국집이 있다는 것은
2년 만에 동아시아면류학설 글을 씁니다.
그동안 일신에 여러 가지 일이 있어 면류학 연구 발표에 소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면을 안 먹어 온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2년 사이에 사회에는 '저탄고단백' , '저탄고지'라는 말세의 풍조가 만연하여 행복의 근원인 탄수화물, 그중에서도 면을 기피하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먹고 살기는 더욱 힘들어졌는데 그 와중에 근손실 예방이라는 허무맹랑한 핑계를 들어서 야만의 상징인 고기만을 무분별하게 추구하는 그런 팍팍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물론 제가 그 야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저는 이런저런 일신의 일들을 해결하며 이 지구 멸망의 풍조를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귀가 얇기 때문에 (!) 저도 짧게나마 운동 열풍에 휩쓸려 PT를 받기도 하고, 바나나같이 허무한 탄수화물 덩어리와 이도 잘 안 들어가는 퍽퍽한 닭가슴살만 먹기도 하고, 그 와중에 면 먹고 싶다고 바다 고린내가 나는 곤약면을 먹다가 헛구역질을... 우억... 하기도 하고...
그런 방황의 길을 헤메이다가 아무리 거듭 생각해도 탄수화물, 그중에서도 '순정 탄수를 자랑하는 면, 면만이 인류의 나아갈 길이요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그런 단 하나의 구원자다'라는 그런 믿음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회개하고 거듭나는 동아시아면류학회 연구자로 돌아와 꾸준히 면을 먹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를 뚫고 인근에 있는 저의 최애 중국집, 그러나 맛만은 호텔 중식당인 정자동 자오챤에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오늘은 이곳의 콩짜장에 대해 소개해볼까 합니다.
이 집은 정자역이나 버스 정류장과는 다소 멀리 있습니다. 가게 규모도 작아요.
인근 아파트 주민들과 네이버를 비롯한 근처 사무실 직원들이 주 고객층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맛있기 때문에 인근 미켈란쉐르빌의 '이화원'과 더불어 정자동 중식의 양대 강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비가 많이 왔는데도 매장에 사람이 많아서 매장 사진은 못 찍고 급하게 메뉴판만 대충 찍었습니다.
테이블 6~7개 정도 아담한 가게에 단출한 메뉴입니다. 양장피, 팔보채, 난자완스 이런 전통의 중화요리는 없고 가족끼리 와서 시켜먹기 좋은 달달한 소스 요리 몇 가지, 짜장과 짬뽕류로 나눌 수 있는 식사류 몇 가지 그리고 약간 생뚱맞지만 딤섬류가 있습니다.
응? 딤섬?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지난번에 한 번 먹어 봤을 때 꽤 맛이 좋았습니다. 주문하면 가게 밖의 찜대에서 바로 쪄주십니다(만두집 밖에 설치되어 있는 김 펄펄 찜기말입니다)
반 접시 메뉴도 있으니 혼자 오신 양 많은 분들은 식사 하나+딤섬 반 접시 추천드립니다.
저희는 탕수육과 콩짜장 곱빼기를 시켰습니다. 조촐한 밑반찬이 차려지고 이어 탕수육이 나왔습니다.
탕수육은 부먹으로 나왔습니다. 부먹, 찍먹 기나긴 예송 논쟁이 끝나고 볶먹이 정권을 잡았다지요?
이곳은 아직까지 부먹이 디폴트입니다. 등심으로 보이는 고기가 상당히 두툼합니다.
튀김옷은 옛날 스타일입니다. 구 중국집의 밀가루 베이스, 흡사 치킨 너겟 튀김옷 같기도 하지만 상당히 바삭거리고 맛있습니다. 한창 유행했던 전분, 식용유 베이스의 꿔바로우 스타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묵직한 튀김옷이 인상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중식이야 말로 매장에 방문해서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갓 튀기면 신발도 맛있다는데 잘 튀긴 고기 튀김이야 말해 뭐하겠습니다. 맛있습니다. 따끈따끈 바삭바삭 치감이 훌륭합니다.
고명이 약간 생뚱맞게, 비타민(샐러드 채소), 레몬 아몬드, 파프리카, 완두콩, 강낭콩, (응 강낭콩?) 아무튼 다소 유니크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맛만 있으면 됐지!
뒤이어 오늘의 주인공 유니 짜장이 나옵니다.
자오챤 메뉴판의 유니 짜장 하단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고기와 야채를 잘게 다져 식감이 부드러우며 콩 함유량을 높여 더욱 구수한 맛
평소에는 아삭 거리는 식감을 즐기기 때문에 간짜장을 더 선호합니다만, 이 집의 짜장은 단 1종 유니 짜장뿐입니다. 처음 먹었을 때에는 보슬보슬 작게 잘려있는 이 식감이 낯설었지만, 한 입 딱 떠먹으면 풍성하게 입안 가득 물들이는 콩 소스의 풍부한 맛이 무척 좋기 때문에 잘게 썰린 야채 따윈 곧 잊어버리게 됩니다. (야채 편식파)
콩 함유량이 높아서 더 구수하다고 하시더니 확실히 잔잔하게 퍼지는 고소한 맛이 있습니다. 기름을 많이 쓰고 MSG와 설탕을 많이 넣는 일반 검은 짜장보다 콩을 많이 넣은 춘장을 덜 느끼하게 볶아 내온 뭉근한 갈색 짜장, 그러니까 된장과 춘장 그 어디쯤에 있는 구수한 짜장 소스 맛이 새롭습니다.
그렇다고 MSG를 넣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중식에는 MSG 가 들어가야 맛있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서 연하게 느껴지는 조미료 맛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이 집 짜장은 오래전에 먹었던 효창공원 신성각 짜장이 언뜻 생각나는 맛이었습니다. 물론 신성각은 아삭하게 볶은 양파의 식감이 느껴지는 조미료 없는 수타면이지만, 저는 자오챤의 농밀하게 끓여낸 진득하고 순한 유니 짜장의 맛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어요. (그나저나 21세기가 기다리던 신성각 사장님 잘 계시려나요...)
어쩌면 오너 셰프이신 사장님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장님 혼자서 안쪽 주방에서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 내오시는 것 같은데, 뭐하나 엉크러짐 없이 음식이 착착착 잘 나옵니다. 맛이나 퀄리티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되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홀을 봐주시는 여사님들의 서빙 스킬도 자연스럽고 능숙합니다. 단무지가 떨어질 때쯤 다가오셔서 자연스럽게 리필해주시는 그 센스. 언제나 감탄합니다.
나오면서 명함을 하나 가져왔는데 경주 힐튼 중식당과 취영루에서 일하셨더라고요.
이 콩짜장은 오랜 경력에서 나오는 은은한 맛인가 싶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집에 돌아가서 밥할 생각이 아득해질 때 슬슬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믿을만한 중국집.
한 그릇 먹고 집에 돌아와 씻고 누워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은 짜장면 한 그릇.
집 근처에 스타벅스가 있는 것보단 동네에 이런 맛있는 중국집이 있는 것이 제게는 더 든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