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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콜라 Feb 13. 2021

마음에 헬멧을 쓰다

완충공간 만들기

 
오빠는 엄마 기일에 어김없이 무덤 사진을 보내왔다. 정면과 좌우 삼십도 각도에서 찍은 석장의 무덤 사진.   석단 위에는 배와 사과, 북어포 등이 간소하게 차려져 있다. 십이월의 아버지 기일에 받는 사진과 하나도 다를  없다. 벽제 용미리를 지나 시냇물을 따라  포장도로로 빠지면 무덤으로 뒤덮여있는 산이 나온다. 그곳 봉우리들의 꼭대기   곳에  부모님의 합장묘가 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누나와 둘째 누나, 넷째 누나와 동생에게 지난 십오  동안 같은 사진을 매해 서너 차례씩 보내준다. 날짜가 비슷한 엄마 기일과 구정 설은 합하고, 한식날과 추석명절인데 더러  차례  있다. 은퇴한  누나와 둘째 누나가 한국으로 놀러 갔을  오빠가 누나들을 태우고 방문하는 코스로서 봉분 앞에서 기념사진  컷을  찍는다. 우리 남매들의 고국 관광 명소라고나 할까. 아주 오래전 아버지 묘를 이장하던 때가 생각난다. 수맥이 흐르는 자리라고 하여  해를 벼르다가 이장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나와 오빠가 참관을 했다. 겁이 많은 나는 뭐라도 보일세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우리 아버진데 뭐가 무섭냐며 곁에서 과정을 꼼꼼히 지켜보는 오빠를 보며 역시 남자는 남자고 아들은 아들이구나 싶었다. 오빠는 다섯 자매들 중에 아들 하나라 어려서부터 장년이  때까지 마음 여리고 인정 많고 청소도 요리도 곧잘 했다. 엄마는 귀하게 얻은 아들을 과하다시피 보호하며 키웠고 아버지는 사내 눔이 저렇게 여려서 어쩌나 끌탕을 하기도 하셨었다. 환갑을 넘긴 오빠는 진즉부터 남성성도 커져 무척 씩씩해졌다. 세상의 거친 파고를 넘어 살아남으려니 강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역시 힘든 고비를 겪을 때마다 강해져야 한다 하고 어금니를  다물고 자신을 몰아붙이며 몸에 힘을 잔뜩 주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때엔 내가 바라는 것이 그렇게 크고 어마어마한 것도 아닌데  인생엔 그까짓것도 허락이  된단 말인가 싶어 마음과 몸이 함께 무너진 적이 여러  있었다. 괴로운 마음, 이것 하나만 없앨  있다면 어떠한 일에도 여여하고 유유자적할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는 간절함으로 마음공부를 시작했다. 서적들도 읽고 유튜브의 강의들을 섭렵하며 멘토를 찾아 헤맸다. 시간이 갈수록 수시로 일어나는 생각끌려 다니는 정도가 줄어들었다. 문득   생각알아차리면 맑은 마음, 순수 이성(에크하르트 톨레가 이름 붙임) 생각을 일으키는 그것에게 멈추라고 넌지시 명한다. 그러면 모래밭에 쌓아 놨던 모래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랄지 글자랄지 환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것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사실  상관이 없었는데 젊을 때엔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다는 소리도 듣고 싶고 좋은 일로 이름도 날리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면 결과에 미리 마음부터 빼앗겨 평화롭고 행복할  있는 유일한 순간인지금을 쓸데없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채웠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해 주면 좋겠다 싶어 마음을 졸이다가 드디어 연애를 하게 되면  사랑이 변함없이 한결같기를 바라게 된다.  사람이 좋다는 설렘 자체를 즐기고 사랑에 빠진  기쁨을 누리 퍼센트 행복할 수 있었건만 생각이 미래로 가는 앞서가는 바람에 맘껏 행복하지 못했다. 나중에 어찌 될지는 그때 가서 그때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맡겨둘 일이다. 며칠 ,   ,   후의 일을 지금의 내가 해결하려 했고 며칠 ,   ,   전에 벌어졌던 일을 지금의 내가 고쳐보려 했다.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  자신을 괴롭혔다.   있는 일은 지금  순간 커피 잔에  커피를  모금 음미하는 것이고 창문 앞에 놓인 화분꽃에 눈을 두는 것이고 창밖에 부는 바람의 소리를 귀에 것이다.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이 땅에  딛으며 걷고 있는 이것이 기적이라고 하는  말은 되새겨 볼수록 맞는 말이다.  위를 걷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병이란다. 우리는 생활 속의 각종 기기들을 통해 매일  순간 기적을 보고 있다. 수십  , 도를 닦고 닦아 ,이 미터 공중부양을   있다   그게  대수인가.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수백 명의 승객들과  많은 짐들을 합해 무게가 수십 톤이 넘어가는데도 불구하  높은 하늘을   있는데 말이다. 아침이 되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서  몸에 달린 눈을 뜨게 하고 하루 스물네 시간  몸에 달린 코로 저절로 숨이 들고나게 하고 달린 입으로 말도 하고 먹기도 하게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알아차리고 나면 고통도 번뇌도 크게 줄어든다. 물론 여전히 순간마다 번뇌가 일어나고 고통도 따라서 오지만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은 왔다가 간다는 말을 되뇌며 일어난 생각을 떨어져서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하니까 누구 말대로 고통이나 번뇌와의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생겨 완충을 시켜준다. 마음 거죽에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는 느낌이랄까. 덕분에 아픔도 덜하고 피해도  입는다. 쟤는 지가 알아서 머물 만큼 머물다  테니 내버려두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이나   있는 것을 하려고 움직인다. 나가서 걷거나 호흡에 집중하거나 사람들과 함께 있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기도 하고 강아지 목욕을 시키거나 식물을 돌보기도 한다. 겉으로는 매일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만들어낸 불행에 빠지지 않으니 내적인 삶은 확연히 달라졌다.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깨달음이 자신의 코 끝에 그리고 발 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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