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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배우 Aug 14. 2024

5화_독백 발표(상)

독백발표를 준비해 보자!

뮤지컬 동호회가 나의 일상에 슬슬 엉덩이를 디밀고 시간을 비집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변화는 늘 불편한 이질감을 준다. 익숙함을 깨는 건 직장인에게는 특히 치명적이다. 동호회를 시작했다는 건 일상의 변화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암묵적 동의가 깔린 일이지만 아직은 적응이 필요했다.     


동호회 수업을 듣고 나면 크진 않아도 연습해야 할 숙제가 생긴다. 초반에는 주중 두 번은 꼭 시간을 내어 연습실에 갔다. 연습하는 것은 늘 뿌듯하고 보람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까운 저녁 시간을 야금야금 까먹는다는 게 문제였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겠지만 평일 저녁 시간은 정말 귀하다. 저녁 먹고 밀린 집안일만 좀 해도 뭐 했다고 벌써 밤이 된다, 운동도 하고, 책도 좀 읽고 싶다면 그날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평일 저녁은 항상 부족하고 늦게까지 깨어있을 체력도 없으므로 동호회 다니기 전 일상을 지키면서 연습도 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잔뜩 쌓여버린 설거지거리와 빨랫감을 멍하니 보다 보니 대체 어디까지 뮤지컬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주중에 연습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뮤지컬을 잘해서 내 커리어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 취미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저울질이 시작된 것이다.      


‘남들은 자격증도 따고 대학원 간다고 공부를 더 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렇게 정성 들여 놀아도 되는 건가...’     

살짝 불안해진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유튜브 알고리즘은 ‘자기 계발’, ‘돈 버는 습관’,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바뀐 것’ 등 온갖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영상을 띄우며 고민에 박차를 가했다. 영상 속 그 사람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들을 등지고 취미에 자꾸만 시간을 쓰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괜히 뒤처지는 것 같았다.     


‘그냥 놀아도 배부른 한량 소리 들었을 텐데 심지어 시간과 돈까지 들여가며 놀다니... 나는... 쓰레기야아아ㅇ악...!!!’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중에 연습실은 도저히 가면 안 되는 유해시설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래, 주말에 동호회 가는 걸로 족해. 주중에 뮤지컬은 금지야!     



동호회의 연기 기초 수업이 마무리되던 주에 '독백 발표'가 과제로 주어졌다. 독백 발표는 내가 원하는 작품의 한 장면을 골라 독백의 형태로 짧은 연기 발표를 하는 것이다. 아주 짧은 것도 괜찮고 긴 것도 좋은데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대뜸 자아 성찰의 방으로 내몰린 나는 대체 내가 뭘 잘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유튜브에 '여자 독백'을 검색해서 영상을 쭉 시청했다.     

‘여자 역대급 오열 연기’ - 와... 대단하다... 난 눈물 한 방울도 안 날 듯. PASS!

‘다른 여자와 잤다는 사실에 폭발’ - 아직 결혼도 안 해봤는데 벌써 불륜...? PASS!

‘소름 돋는 여자 살인마 연기’ - 헤엑 무서워ㄷㄷ PASS...;;

‘섹시한 ...’ - Paaass ^-^     


눈알이 빠져라 유튜브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도무지 뭔지 모르겠던 그때, 한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에 나오는 김슬기 배우님의 귀신 연기였다. 발랄한 분위기에 코믹한 끼가 돋보이는 장면인데 적당히 가볍고 통통 튀는 것이 내 수준에 딱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     


독백을 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대사도 정해졌겠다, 이제 남은 것은 ‘연습’뿐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마음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 독백 연기를 하게 된다는 거지?’     


독백 연기는 뭔가 초고수 대배우들만 하는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원래 연기에 관심이 있었다 보니 관련 영상도 종종 찾아보곤 했었는데 독백 연기 영상은 너무너무 멋있었다. 특히 ‘서울독립영화제’의 ‘60초 독백 페스티벌’을 흥미롭게 봤는데, 수상자 배우님들 연기는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다. 앞뒤 상황 설명도 없고 배경 음악도, 무대 세트도 없이 배우님 한 명만 덩그러니 있는데 60초 만에 넋을 잃고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물론 나에게 기대되는 퀄리티는 그 정도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존경스러운 그분들과 똑같이 ‘독백’을 준비한다는 사실만으로 동기부여는 충분했다. 맘속 깊이 잠자고 있던 연기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일단 대사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샤워하면서 영상을 무한 재생하며 배우님의 목소리 위로 대사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밥 먹으면서 외운 대사를 웅얼웅얼 말해보기도 했다. 대사가 얼추 외워진 뒤엔 거울을 보면서 배우님의 표정을 따라 해 보았다. 무리하게 시간을 내지 않더라도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연습했다.      


발표 날짜가 가까워지니 진짜 무대에서 하는 것처럼 실전 연습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연습실을 가볼까 싶었지만 ‘괜히 또 쓸데없는 데 시간을 쓰나...’ 하는 생각이 불쑥 발걸음을 막았다. 그래서 그냥 자취방에서 대강 시뮬레이션해보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자취방은 방음이 전혀 안 되어 조금만 큰소리 내면 당장 옆집과 대화도 될 것 같은 환경이었으므로 조금 해보다가 금방 포기하게 됐다.     


'에휴 이 정도 연습했음 됐어. 영상도 질리도록 많이 봤고 대사도 다 외웠잖아! 무슨 느낌인지 충분히 알았으니까 남은 건 가서 하면 돼!'     


독백 발표 당일, 수업 시작 전에 미리 연습하기 위해 일찍 동호회 연습실에 도착했다. 연습실에 들어가자 나보다도 더 먼저 오신 분들이 많았고 각자 준비해 온 대사를 연습하고 계셨다.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고 진지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금 움츠러들었다. 내가 준비한 발표가 갑자기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찡찡댈 수 없으니 발표 전 주어진 시간 동안 뭐라도 해내야 했다. 정신을 초집중하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연습을 벼락치기하기 시작했다. 자취방에서 작은 목소리로만 대사를 해보다가 큰 소리를 내보니 조금 어색한 느낌이었고 손발을 대강으로만 쓰다가 제대로 움직이려니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업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마음은 자꾸만 급해졌다.




독백발표(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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