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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배우 Aug 20. 2024

6화_독백 발표(하)

내가 좋아하니까 중요하다!

급해진 마음만큼 시간은 급히 흘러 수업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오늘의 일정을 안내해 주셨다. 이어진 안내에 따라 우리는 (우리 = 같은 반 회원들과 나) 발표를 하게 될 위치에 서보기도 하고 조명에 익숙해지는 연습도 했다.      


이번 독백 발표에 쓸 조명은 주로 ‘핀조명’이라고 부르는 하얗고 강한 빛인데 배우가 있는 작은 공간만 동그랗게 밝혀준다. 그러면 관객이 봤을 때 어두운 공간에 흰 동그라미가 있고 그 속에 배우가 있는 것으로 보여서 배우에게만 시선이 집중될 수 있다. 핀조명을 처음 받아보는 배우는 생각보다 훨씬 강한 빛에 당황하게 된다. 흔히 눈뽕이라고 부르는데, 어두운 밤에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눈앞에 환히 켜졌을 때와 비슷하다. 그리고 빛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기도 해서 배우가 움직이다가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꼭 조명 앞에 서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잠깐의 적응 시간을 거쳐 이제 정말로 발표를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선생님께서 발표 순서를 정해주셨고, 상당히 앞 순서를 받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손발이 저릿할 만큼 긴장이 됐는데 막상 순서가 정해지고 나니 갑자기 진정이 되면서 괜찮아졌다. 뭔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마저 들었다. 숨을 고르고 속으로는 대사를 암송하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발표할 차례가 오고 어둠 속을 걸어 자리를 찾았다. 조명이 들어오고 번진 빛 그 뒤로 어렴풋이 연출 선생님과 회원님들이 보였다. 그 순간, 갑자기 시선이 의식되면서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뭔가 잘할 것 같은 그 이상한 자신감은 이상한 게 맞았다. 첫 대사 시작도 전에 그만 나는 정신줄을 놔버렸다.      


무대 시작 전에는 ABCDE 나름의 순서와 계획이 있었는데 당황한 즉시 머릿속은 FTGARC 뒤죽박죽 난리 깽판이 됐다. 대사를 절었고 뒷 대사를 앞에 먼저 해버렸다. 그러니 뒤에 가서 할 대사가 없었고 그래서 내 맘대로 즉석에서 대사를 조합해 냈다. 동공은 갈 길을 잃었고 두 손 두 발 모두 갈 길을 잃었는데 어떻게 수습할 길이 없었다. 망한 발표에서 가장 최악인 점이 뭔지 아는가? 그것은 이 발표가 이미 망했다는 걸 알고 앞으로 더 망해갈 것임을 알면서도 망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최악의 발표가 끝났다. 뒤에 발표가 계속되는 동안 나의 망함 사태를 뉘우치느라 온전히 집중이 안 되었다. 다들 나보다 훨씬 준비된 모습이었고 프로 배우의 무대만큼이나 숙련되고 세밀했다. 솔직히 동호회 수업을 듣다 보면 이분은 연기가 좀 어색하시네, 어 이분 연기 좋으시다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는데, 그날 발표에서는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다들 정말 대단하셨고 배우로서 멋졌다.      


아무도 나에게 왜 그렇게 준비를 안 했냐고 책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석고대죄 반성을 하느라 온 정신이 복잡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원하고 잘하고 싶었던 일을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인데. '하고 싶었다'는 것 외에 또 어떤 다른 이유가 필요했을까.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는 게 왜 스스로에게 부끄러웠을까.       


초등학생 때 리더십 캠프라는 제목으로 성공하는 습관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어른들이 줄곧 하는 잔소리들을 (초딩의 눈에) 휘황찬란한 상품과 함께 다양한 활동으로 배웠더니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중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표가 오래도록 삶에 영향을 미쳤는데, 지금 찾아보니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라고 한다.
        

아이젠하워 매트릭스


할 일의 목록을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급하거나 급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 뒤 중요하고 급한 일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이 표의 주요 메시지이다.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것 등, 내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들은 모두 중요하면서 급한 일의 범주에 들어갔다. 반대로 친구와 놀기, 가족과 오붓한 시간 보내기 등 미래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의 범주에 묶여 할 일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그 기준에 대해 의문을 품어보지 않았는데, 이제야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왜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되어야 했을까.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건 뭘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했지만 나는 아무리 써도 ‘몸에 좋은 거야’라는 수식어만 붙으면 눈을 꼭 감고 억지로 코를 막아서라도 삼켰다. 그리고 아무리 달다고 해도 ‘몸에 나쁜 것’이라면 최대한 멀리했다. 그게 너무 당연해서 이제는 쓴 음식은 좋고, 단 음식은 나쁜 것이 되어버렸다. 사실 정말 좋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순도순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일 텐데, 본질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

     

이제는 예전만큼 필사적으로 미래를 향해 뛸 만큼 불안정한 상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관성 탓인지 더 더 먼 미래를 그리며 뛴다. 뛰는 것보다는 뛰고 있는 기분이 중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뛰는 기분에서 오는 안정감을 의심한 적 없었는데, 처참히 망해버린 독백 발표를 계기로 머리를 댕 맞은 것처럼 깨어났다.     


내가 좋아하니까 중요하고, 내가 하고 싶으니까 급한 일이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일에 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기로 했다.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커리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니까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조금 더 세심히 귀 기울이고 정성을 들이기로,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항상 중용이 중요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는 만큼,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한다. 내 삶에 필요한 일을 하는 만큼 필요 없는 일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동안 뮤지컬에 시간과 돈을 쓰면서 행복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느라 혼란스러웠는데, 새로운 깨달음 이후로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렬히 좋아하는 지금의 내가 좋다. 내가 아끼는 것들을 온 정성으로 아껴주는 지금이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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