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그래! 나는 반쪽짜리다

by 주명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배를 곯을 때는
지옥은 닫힌 문이다'
- 찰스 부코스키 <지옥은 닫힌 문이다> 중


왜 예술을 떠올리면 ‘배고픔’이 생각나는 건지. 별 상관없는 단어의 만남은 오히려 낯설어 뇌리에 박힌다. 그러나 낯설어서 주춤주춤 하는 동안 누군가의 배고픔은 빨리 벗어나고픈 지옥 같은 현실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삶을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인간은 복잡하지만 이리도 단순하다.

예술은 정신을 드높여주고 심미안을 길러주며 인생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예술을 보고 듣고 느낀다. 그래서 책을 읽고 노래를 듣고 공연을 감상하고 스포츠 경기장을, 전시회와 박물관을 찾아간다. 공간이 주는 아름다운 감동이 있다면 카페도 예술이다. 우린 숨쉬기 위해 예술을 찾아간다.

‘미국 하층계급의 삶을 노래한 국민시인’이라 불리는 찰스 부코스키는 거침없는 단어로 글을 써 내려간다. 오랫동안 하급 노동자로 살다가 우체국에 들어가 일을 하다 50세가 되어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의 시를 읽고 있자면 마치 시가 시시껄렁한 표정을 하고 침을 뱉는 듯하고, 술에 취해 윽박지르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날라리’다. 그러나 그가 휘갈기는 천박함에도 길러낼 수 있는 생각의 깊이는 깊다.

특히나 글의 처음에 적은 그의 시는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왜 예술은 배가 고픈 것인가? 지옥문을 열어 천국으로 갈 수 없는 것인가?’

분명 사람들은 예술에서 감동을 얻고, ‘예술을 안다’고 표현하는 것만큼 자신을 고상하게 포장할 수 있는 윤기가 차르르 도는 고마운 문장도 없을 텐데 왜 예술은 큰 감동에 비해 밥그릇에 붙어 식은 딱딱한 밥 알 하나만도 못한 존재가 될 때가 있는 건가. 왜 세상은 그들을 짓눌러 버리는가.

내 안에만 몰두해서 만든 예술이니까 남들은 못 이해해서? 세상 돌아가는 건 쥐뿔 모르고 나의 세계에만 취해 있어서? 세상은 예술로만 돌아가는 낭만적 현실이 아니니까?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경제적 감각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말이 좋아 예술가이지 그냥 ‘멍청이’라서?

예술은 여행을 떠나서라도 보고 싶은 소원의 대상이면서도 누군가는 욕하며 지나가는 쓰레기이자, 아니 그것만이라도 되면 감지덕지. 아무도 못 알아채는 투명망토를 휘두른 종이며 덩어리고 소음이기도 하다. 예술은 언제나 양극단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그런 얼굴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예술은 예술가 본인의 정신과 가치관을 담고 있다. 설령 누군가 이해하지 못해 그것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논한다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린 서로가 이해가지 않는 ‘오리지날’ 아닌가. 자신을 또 다른 무엇으로 탄생시키는 인간의 창조력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 특권을 행사하지만 세상은 배부른 예술가를 시기라도 하는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이 탄생시킨 예술가일지라도.

예술가의 배고픔은 경제적 허기뿐 아니라 정신적 허기까지 지칭하지 않을까. 더 아름답고 새로운 감각을 향한 열망, 내 안에 더 꺼낼 보물이 많다는 끝없는 욕구와 자랑은 가장 먼저 달려들어 열고 싶은 문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끊임없이 창조해내기 바쁘다.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은 만족감을 배 불리기 위해 방 안에 틀어박혀 몰두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을 토대로 만든 예술을 세상에 나눠준다. 자신의 예술을 남들과 떼어먹느라 늘 배고플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 경제적 배고픔과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내 방 안에 온전히 틀어 박혀있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을 동경한다. 나는 예술가인 직장인이 아니라 지루하게 흘러가는 시간, 옷이라도 특이하고 빛나는 걸 입고 싶어 하는 예술가인 척하는 생계인이다. 아니다. 그래도 나를 좋게 평가해야지. 나라도 나를 애써 감싸줘야 하지 않겠나.

나는 배는 채웠지만 정신은 허기지고 목마른 사람이다. 나는 반쪽자리 예술가다.

반쪽자리 예술가여도 좋다. 삐그덕 삐그덕 걸어도 좋다. 삐그덕 대며 걸어도 익숙해지면 남들은 못하는 나만의 걸음을 걷지 않겠나. 그러다 보면 특이함과 새로움을 먼저 발견하기 원하는 누군가의 눈에 들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기 위해 걷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걸음을 알아보는 누군가를 만나기 원한다. 그러기까지 나는 계속 걸어야 한다.

내 걸음이 지옥문을 열기 위해 걷는 걸음이면 좋겠다. 지옥문도 저절로 열리는 당찬 걸음을 걸으리라!

걷다 나자빠지면 어떡하냐고? 별 수 있나 그냥 나자빠지는 수밖에. 넘어지는 게 무서워 걷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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