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엄마가 내가 제주여행에서 사 온 귤 잠옷 바지를 입고, 동생의 강아지 슬리퍼를 신고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동생이 앉아있었고 나는 그들 사이에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모이면 사랑이도 꼭 모임에 끼려고 온다. 가끔 가정예배를 드리기 위해 거실에 앉아 있으면 사랑이도 슬금슬금 와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이 사람 저 사람 쳐다보기도 하고 우리 사이를 걷기도 때론 성경책에 엉덩이를 대고 앉기도 한다. 귀여운 것! 본인도 이 집의 구성원임을 아는 거겠지.
사랑이의 적절한 위치 선정은 나를 사진 찍게 만들었다. 인간은 왜 귀여운 것을 보면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까. 사실 벌렁벌렁 대지 않고 뻐렁친다. 그런데 뻐렁친다는 말이 사전에 있는 표현이 아니었네. 사랑이의 얼굴과 엄마가 신고 있는 강아지 슬리퍼의 위치가 웃겼다. 자, 이제 누가 사랑이지?
정말 귀여워서 엄마와 동생에게 사랑이 좀 보라고 했지만 의자에 앉아 있으니 식탁 상판에 사랑이가 가려져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엄마가 웃었다. 귀여운 모습을 나만 직접 봤다.
그리곤 잠시 뒤에 알았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봐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고. 높은 곳에서 봐야 다양하게 볼 수 있다고. 나는 서 있어서 사랑이의 사랑스러움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성장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성장을 갈망하는 근본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깨닫는다. 성장은 좁은 시야를 넓히고, 남이 보지 못하는 장면을 보게 한다. 세상의 다양성과 이면, 그리고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기 위함이 성장의 본질 아닐까. 그냥 높은 자리에 서 있으려고만 하는 건 욕망이다.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조그만 사랑이를 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