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마음만 떠돌아다니고, 어떤 결말을 낼지 모른 채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다. 글을 쓰고 난 뒤 문장 속에서 제목을 찾는 나는 이 글의 제목이 무엇이 될지 예상하지 않고 밝은 화면만을 내 방의 생기 삼아 글을 쓴다. 내 뒤로는 <재즈의 시인 빌에반스 플레이스트>라는 제목의 플리가 재생되고 있다. Bill, 당신은 건반으로 인생을 지어 찬미했군요.
돌이켜보면 마음이 힘들었던, 아니 괴로웠던 시절에 써 내려가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창작의 고통이라 하지 않나. 예술적 의미의 창작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무언가 내뱉었고 쏟아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문장을 만들어냈으면 창작이지 뭐.
왜 힘들어야 잘 썼을까. 고통은 어쩌면 나를 돌아보게 하는 인생의 작업이었지도 모른다. 그 작업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와 가치관을 세워 나갔겠지. 무언가를 부수든 새로 만들든 내겐 공사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겉으론 차분해 보였는지 모르지만 내 안은 언제나 듣기 힘든 소음으로 가득했다.
가끔 그때의 글을 보면 무얼 말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배출이었지만 한편으론 지금은 할 수 없는 깊은 생각이 있었다. 괴로울수록 마음을 긁어내고 긁어내서 인생의 밑바닥을 보았다. 밑바닥. 그건 나의 추락을 마주하는 곳이 아니라 나의 근원, 인간의 본질을 경험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난 그 밑바닥이 싫었지만 좋았다. 밑바닥을 알아야 어떻게 쌓아 올릴 수 있을지 알 수 있으니까.
결국 모든 건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끝을 상상하고 결정할 수 있다. 바닥에 있어보지 않은 인생은 볼 수 없는 괴롭지만 찬란한 인생의 설계도가 있다.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 아는 건 그냥 이렇게 쓰고 싶으니까. 내 마음이다. 나도 파악할 수 없는 내 마음에 대해 나는 뭐라 할 수 없다. 사실 나도 나에 대해 뭐라 하지 못하는데 내가 인생에 대해 뭐라 말하겠는가. 그저 주어진 인생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예의며, 헌신이고, 연민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눈앞에 밀려들어온 것을 보다 사랑으로 읽어내는 어려움이길. 지나고 보면 인생은 사랑으로부터 깨어진 파편이다. 모든 게.
그래서 고난을 사랑이 아닌 것으로 보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