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닮아서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여러 작은 과제들을 스스로 만들곤 한다. 하지만 계획 많이 세우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수립한 계획의 절반도 이행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관심사는 다양하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거의 없다. 몇 번 들어봤을 뿐, 자신 있게 설명이 가능한 주제는 아마도 손에 꼽을 듯하다.
책의 제목이 그대로 나의 상황을 반영한다.
이런 나를 보시며 아빠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단 한 가지 분야를 파고들어 전문성을 가지고 난 뒤에,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라고 말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 그건 참 따분하고 지루하게만 들릴 뿐이다. 하나의 주제를 공부하다 보면, 그와 비슷한 성격의 주제부터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주제들까지 자꾸 호기심이 생긴다. 처음에는 내가 학습하는 데에 있어서 ADHD와 같은 증상이 있는 게 아닌지까지도 생각하였다. 왜 나는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다 읽지 못한 채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일까?
약 2년 전, 오픈 코스 웨어(OCW) 중 하나인 K-MOOC에서 공개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인문 브리꼴레르 프로젝트'라는 강의를 듣게 되었다. 여러 강의들이 제한된 시간 내에 전달되어야 했기에 강의시간은 약 30분 내외였다. 그런데 그 30분 동안 들었던 수업 때 받았던 감동과 전율은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철학적 개념을 미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법을 참신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나는 항상 학점을 꽉 채워 듣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저녁마다는 세미나를 들으러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주말에는 학회에 종종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때 들었던 강의는 나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힌 몇 안 되는 강의 중 하나가 되었다.
다양한 대학 강의를 학습할 수 있는 유용한 오픈 코스 웨어다. 우수한 강의들이 충분히 많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유용하다.
무엇이 그러한 강의를 만들었을까?
물론 강의를 준비하는 교수자의 노력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강의자의 언변도 훌륭하였고, 학습 자제 활용도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고자 한다. 강의가 끝난 이후에, 나는 그 교수에게 다가가서 질문을 했다. "저도 앞으로 교수가 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내용의 강의가 아닌, 저만의 특별한 콘텐츠를 전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말이다.
질문을 들은 그 교수는 갑자기 자신의 학력을 내게 말해주었다. 그는 학부는 공학을 전공하고, 석사는 예술을 전공하였으며, 박사 학위는 철학을 전공하여 받았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땐 충격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공부를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학문적인 업적을 이룰 수 있을지 물어보려는 찰나, 그분은 이미 질문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게 연이어 말했다. "여러 분야를 전공하였다는 게 반드시 좋다는 건 아닙니다. 따로 떨어진 지식의 파편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거든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배운 걸 어떻게 엮고 융합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렸습니다."
실낱 같은 희망이 보였다. 세상에는 나처럼 다방면에 관심이 많고, 정말 그렇게 공부해온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는 생각이 하였다. 또, 내가 지향하던 학문적 길을 걸어온 학자가 저토록 멋지고 감동적인 강의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며, 일말의 확신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다짐하였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리라고. 아무리 험난하고 불안하더라도, 내가 하려는 공부와 연구를 해보자고 말이다. 인생 두 번 사는 거 아니니깐.
"나는 내 걸작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어른들은 대답했다. 아니 모자가 왜 무서워?" - 생택쥐페리, <어린 왕자>
솔직히 나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공부하기가 두렵다. 새로운 영역을 계속 탐구하다 보면, 어느새 열정과 도전 정신이 닳아 빠지고 말지 모르는 일이다. 그 교수와 아버지의 충고대로, 어느 한 분야의 업적도 이루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 가방끈은 길어질 대로 길어졌지만, 시간강사로 연명하며 살 수도 있는 노릇이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공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르바이트나 일용직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인생이라는 기회비용을 지불하기에는 불확정성이 너무나도 크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반문하여 본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정말 맞는 길인지 말이다. 현재 신학을 전공하는 내가 대학원에서 과학과 철학을 공부할 계획을 세우고, 언젠가는 종교학을 연구해보려는 생각을, 학계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선뜻 격려하거나 칭찬할 수 없다. 꿈이 실현이라는 결실을 맺지 못한 채, 공상으로 끝나버릴 확률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능력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삶을 꿈꾸고 있기에 나조차도 당황스럽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다리 찢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본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그대로 남기는 사람보단, 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로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을 신은 더 기특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설령 장사를 잘못해서 한 달란트까지 몽땅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