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가끔씩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언제까지 다시 피아노를 치게 될까 말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 학원에 다녔지만, 계속 쭉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죠. 피아노를 치기 싫어서 학원 다니기를 중단할 때도 많았습니다. 개인 레슨을 받거나 할 때도 그렇게 성실했던 편은 아닌 듯싶습니다. 피아노에 재미를 붙이고 나서 몇 년이 흘러서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피아노는 제게서 멀어졌으며, 그 이후로 약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건반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군대에 가기 6개월 전쯤에 다시 피아노 연습하기를 시작했어요. 어쩌면 제2의 피아노 인생이 그때부터 열렸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네요. 점점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서 도망치듯이 다시 잡은 피아노는 저에게 놀랍도록 충분한 휴식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기적은 군대에서도 계속됐고요. 폐쇄적이고 자유가 제한된 공간에서 피아노곡을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황홀감을 느꼈습니다. 본의 아니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답답한 상황에 마주칠 때에도 클래식 음악은 저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었지요. 오죽하면 휴가를 나와서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였을까요?
그런데 요즘에는 과연 제가 피아노를 계속 칠 수 있을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요. 일단 저는 지금 코로나19로 인하여 집에서만 생활하고 있습니다. 만약, 코로나바이러스가 잠잠해진다면 다시 대학 근처에서 살게 될 터이고, 그곳에서는 피아노와 지금처럼 붙어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집에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지내오던 피아노가 떡 하니 있기에 좀더 연주하기가 수월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이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지요. 군대 가기 전에는 월 20만 원에 가까운 돈을 주고서야 피아노를 연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전 이제 올해 8월이면 졸업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학부생의 신분이었지만, 앞으로는 대학원생이 될 것입니다. 대학원에 진학함과 동시에 교회에서 목회 사역도 다시 시작할 예정이구요. 대학원에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게는 부담이 큽니다. 왜냐하면 더 높은 학위로 진학함은 저 자신이 연구자로서 더욱 막중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보고서를 하나 쓰더라도 전과 같이 날림으로 쓰는 게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배 이상으로 부어야 하겠지요. 읽어야 할 자료의 양도 많아질 것입니다. 독해해야 하는 글들의 난이도 역시 올라갈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게다가, 언어 공부도 꾸준하게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하네요.
교회 사역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래에 목회자도 되기를 희망하는 저로서는 반드시 사역 경험을 해야만 합니다. 예전에는 열정에 넘쳐 어디로든지 가더라도 잘해낼 자신이 있었는데,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운 마음이 더 크네요. 이미 한 번 고통을 겪어보았기 때문이겠지요. 매주 설교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상대하며,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거기에 방학이면 수련회 등을 기획하는 일들이 제게는 너무 고되었습니다. 한창 사역을 할 시기에는 주말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어요. 남들은 그토록 바라는 주말이지만, 저는 그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기에 그렇습니다.
현재 궁극적으로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은 바로 학자(scholar)입니다. 어떠한 연구주제를 잡고 그 누구보다 깊이 천착할 수 있는 사람. 정리한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여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아마 이 말은 박사 학위까지 염두에 두고 있으며, 기회가 닿는다면 유학도 고려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으셔도 좋겠습니다. 괜한 걱정을 사서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체감하였을 때 그렇게 비현실적인 고민도 아닐 겁니다. 앞으로의 학업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과정 가운데, 과연 자유롭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쉽게 답변하기란 어렵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피아노 인생은 이미 막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지만, 진로를 변경한 이후로 피아노와 무관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또, 굳이 피아노를 치지 않더라도 진로나 생계에 큰 지장이 없습니다. 이제 저에게 피아노란 선택사항일 뿐이다. 이러했던 상황은 마치 막이 내려간 풍경과 다름없었죠. 하지만 연극은 1막으로만 구성되지 않습니다. 막이 내려갔음은, 언젠가 그 막이 다시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그 막이 올라가는 중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알지 못했던, 생각하지 않았던 점들을 새롭게 포착하고 떠올리면서 말이죠. 간간이 느끼는 단상들은 활자로 승화하여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글이 되었습니다.
본서는 이쯤에서 막을 내립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지만, 못다 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나눌 시간이 오리라고 믿어요. 피아노 인생의 막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있듯이, 본서의 막 또한 다시 오를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이 글을 직접 쓴 사람으로서 제가 독자 여러분에게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음악이 당신과 더 친해졌기를. 토라졌던 당신이 음악과 화해하기를. 그리고 당신에게 바로 이 순간 음악과 함께할 용기가 건네졌기를. 이것 하나만으로 제 글은 임무를 완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