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봉 Jun 08. 2021

돈으로 권리를 살 수는 없다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하여

     노동을 해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용주로부터 일말의 압박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몇몇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 일을 하면서 이것을 경험했다.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는다는 행위는 그만한 노동력을 제공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노동’이라는 가치가 ‘자본’과 교환되면서, 때때로는 ‘권리’가 이양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그 권리란 ‘인격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을 권리’다. 하지만 돈이 만물의 척도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이러한 권리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히는 듯하다.


     정작 학계라고 다를 게 있을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역시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기업이나 정계, 심지어 종교계(여긴 특히 심한 것 같다)에도 ‘갑질’이 있듯이, 학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다한 대학원생들이 ‘학위’나 ‘인맥에 의한 평판’ 등과 같은 압박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비록 내가 현재 대학원생은 아니지만, 대학원에서의 라이프를 담은 몇몇 컨텐츠만 봐도 단번에 느낄 수가 있다. 물론 그런 일이 일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보고 만났던 교수나 지도자들은 오히려 그러지 않은 편에 속한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이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솔직히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받은 자본에 합당한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근무 태만과 다름없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만에 하나 짤리더라도 할 말이 없다. 노동자(학생 혹은 연구원)에게 성실성이란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하는 덕목이다. 만약, 여기에서 잘못된 점이 발견된다면, 고용주는 적절하게 조언이나 코칭을 할 수도 있다. 근무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조금은 엄숙하게 이야기할 때도 있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까지는 ‘갑질’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어떤 고용자는 단지 돈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일종의 특권을 부여받은 것 마냥 행동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입맛대로 사람들을 대하며, 배려나 존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대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만약 둘 사이의 관계가 무언가를 주고받지 않는 사이였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못할 일들이다. 자본으로 노동력을 구매하고자 할 때에는 명심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구입하려는 노동력에는 ‘피고용인의 정신·심리적 노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인권이나 자유, 감정, 기호(嗜好) 등까지 사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대개 이런 자들은 ‘돈’이나 ‘지위’로 피고용인을 좌지우지하려고 하면서, ‘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많다’라며 협박한다. 명시적으로 그러할 때도 있으나, 암묵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부조리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생각을 해본다. 과연 내가 훗날 고용주(학계로 따지자면 지도교수 혹은 책임 연구자)가 된다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연구’라는 노동의 현장과 ‘인격적 교류’라는 사적인 영역을 명확하게 분리하여 대할 수 있을까? 이 경계는 매우 모호하여 언제라도 선을 넘나들기가 쉬울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하기에 더욱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한다. 입장이 변화됨에 따라 얼마든지 사고와 스텐스를 달리 할 수가 있다는 의미다. 소위 말하는 갑을관계에서 내가 ‘갑’이 되었을 때, 나는 이 특권적인 관계 구도에서 벗어나 평등한 가치를 택할 수 있는가? 이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반문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약간이라도 더 조심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중에 내가 그야말로 ‘진상’짓을 하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이 글(언젠가 책자가 되기를 바라는)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이 논제는 앞서 말했듯이, 비단 학계에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돈이 흐르는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땅콩 회항’ 못지않게 비인격적인 사건들이 수없이 발생하는 중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피고용인에게만 용기를 내어 외치라고 말하기에는, 그 리스크와 부담이 너무나도 크다. 그것보다는 고용인이 좀더 인격적이며 사람 대 사람다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편이 서로 간에 훨씬 나으리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이는 나 자신부터 우선 명심해야 할 사항이겠다.


돈으로 권리를 살 수는 없다. 하늘이 부여한 인권(人權)은 언제나 비매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습(習)의 즐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