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적 문제에 관하여
어제 각종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K대학의 L교수가 술에 취해서 지인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소위 명문대학이면서 연구중심대학으로 알려진 기관에서 재직하면서, 논평이나 만담을 언론에 자주 해왔던 유명인이었기에, 이번 일이 더욱 조명되었다. 나는 평소에 그를 SNS상으로만 알고 있었다. 가끔은 꽤 읽을 만한 포스팅을 업로드하기도 했기에 팔로우도 한 상태였다.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내친김에 그가 지금까지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 간략하게 검색해보았다. 소속 기관의 연구실 사이트를 둘러보니까, 역시 적지 않은 연구원들과 함께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왔던 터였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은 일반적인 대학원생들이 나중에 되고 싶은 ‘롤모델’과도 같았다. 물론 그의 정치 성향은 논외로 하고, 단순하게 포지션과 인지도의 측면에서 본다면 말이다. 한국 최고의 대학 중에 하나라는 곳에서 테뉴어를 받아서, 수십 년간 재직했다는 사실은, 그가 사회의 기득권층임을 증명한다. 잠깐 학력을 보자. 그는 SKP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곤 적당히 랭킹이 높은 주립대학에서 조교수 생활을 하다가, 한국의 대학으로 임용되었다. 이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대학원생이 꿈꾸는 환상적인 커리어가 아닌가? 김박사넷이나 브릭, 하이브레인넷 등의 커뮤니티에서는 한 마디로 ‘성골’이라고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했던 사람이 단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성과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 말이다. 명문대학 교수이자 유능한 학자라는 수식어가 이제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남은 건 단지 ‘성범죄자’라는 낙인뿐이다. 그가 소속한 대학에서는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바로 ‘직위 해제’를 결정했다고 한다. 아마 민·형사 재판이 이루어지고, 형량에 따라서는 해임이나 파면과 같은 징계가 부여될 수도 있다. 피해자는 현재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만인에게 존경과 감사를 받았던 사람이 하루만에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성(性)적 문제’가 존재했다. 사실, ‘성’만큼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영역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와 관련한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솔직하게 그것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은밀하고 사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눈에 드러나지 않은 요소인 만큼, 왜곡되기도 쉬운 대상이 바로 성이다. ‘이 정도는 문제가 안 되겠지.’, ‘이건 범죄 축에도 못 끼는 거야.’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던 잘못된 성인식(perception of sexuality)이 결국에는 파멸로 이끌어버렸다. 사실, 성적인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무성애자(asexual)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본능적인 성적 욕망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느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정상적인 가치관’을 갖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즉, 평소에 어떠한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적인 순간에 범죄자가 될 수도, 아니면 평범한 일반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특히 L교수의 정황처럼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는 더더욱 본성이 극대화된다. 본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가 날것 그대로 표출된다는 말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술에 취한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고자 시도하는 행위는 추호도 할 수가 없다. 그런 행동을 하는 즉시, 자신은 경찰에 연행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양산되며 누군가에게 결코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길 것이라는 예상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에 정상적인 사고가 아니라, 비윤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경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과 가학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다.
인간의 윤리 및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요인은 다양한 층위로부터 찾을 수 있다. 한 사람이 교류하는 사람들의 성격과 인식, 그가 어떤 매체와 컨텐츠를 주로 접하였는지, 본인의 잣대를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할 기회가 있었는지, 의식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등등... 아마 L교수는 유명대학 정교수라는 직위 덕택에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받는 일은 적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들과 만나서 뭘 주제로 이야기하곤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세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슷한 주제로 자주 받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아, 또?’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일관적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인간은 투입하는 ‘양과 질’만큼 산출되기 마련이다. 그게 영국 경험론자들의 핵심 아니었던가?
아무튼, 한 사람의 몰락이 보여준 끝은 오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경종이 된다. 내가 요즘 투입하는 데이터는 어떤 종류의 것들인가? 나는 의식적으로 객관적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자 하는가? 아니, 그보다 가장 최근에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공감이라도 보여준 적이 있었는가? 어쩌면 이는 학자와 연구자에게 ‘학문’보다도 더 먼저 해야 할 ‘제0의 과업’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정보를 잘 가공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류를 향한 애정이 결여된 채로 악용된다면,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많은 논문과 책을 집필하여 다수의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면 뭐하나? 그걸 읽은 사람들이 나중에 부끄러움과 수치, 후회를 느끼게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고작 ‘흑역사’로 남겨질 뿐이다.
앞으로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뉴스에 보도된 범죄자들도 학생 시절에는 자신의 앞날을 그렇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잘못된 판단과 실수가 누적되어 눈덩이를 만들었다. 따라서 내가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게 미래의 나를 만들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행동과 언어, 사고, 대화하는 사람…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모여 훗날의 나의 모습을 조형할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무언가 대단한 업적을 세우고 싶은가? 좋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사람’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