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바라지도 않아, 무당이라니.
2021년 설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내가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는 소릴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다.
"신내림"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으니 황당하긴 하지만, 쉽게 그 허튼 말을 떨쳐내지 못한 내 상황에 더 속이 상했다.
친한 지인들이 광주 광천동에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그래서 영발이 좋은) 무당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워낙 잘 맞춰서 신기하다고 지인들이 입에 침이 닳도록 떠들어대는 통에, 이제 점은 안 봐야지~라고 다짐했던 내 맘을 결국 흔들어버리고 나도 모르게 예약을 하게 됐다.
5시 30분에 예약을 하고 시간을 맞춰 방문하니, 들어서자마자 향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래 이게 무당집이지
이 무당은 특이하게 점사를 보기 전에 입구에서 깃발을 3개를 뽑더니, 그 깃발을 가지고 점을 보기 시작했다.
그 깃발을 시작으로 점을 보기 시작...
"서쪽에서 좋은 기운이 온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일이 이루어진다"
이 두 마디를 해주고는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오, 왠지 느낌이 좋은데? 좋은 일이 생긴다고?"
내심 기대에 차올라 조심조심 마룻바닥을 밟으며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무당은 살짝 험악하게 생긴 50대 아저씨였는데, 누가 봐도 무당처럼 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믿거나 말거나 과거에 건달이었다고 한다. 생긴 걸로 봐선 충분히 납득이 가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약간의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들어갔으니 내심 내 점괘가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주 참담했다.
"아이고~ 동서남북 사방이 막혀있고, 운명이 꼬여있는데 이를 과거에 풀었어야 했지만 풀지를 못했구나. 너는 공무원이나 전문직을 해야 할 팔자인데 둘 중 하나는 아니지? 그게 아니면 PD나 기자, 방송 쪽 일을 해야 해!"
그리고 나에게서 살기가 굉장히 강하게 느껴진다나? 뭐 어느 것 하나 좋을 것 없는 이야기들 투성이었다. 최근에 일이 좀 안 풀리던 시기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그냥 멘털이 바사삭 무너졌다. 한 해, 두 해를 넘기면서 언젠간 풀리겠지!라는 희망을 갖고 나름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앞으로 계속 막힌다고 하니 기분이 어지간히 더러운 게 아니었다. 신경을 안 쓸려고 해도 당시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여서일까. 그냥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렇게 멍을 때리면서 듣고 있는데 갑자기 그 말을 내뱉었다.
"근데 넌 나랑 같은 길 가야 할 팔자야"
네????
39년 만에 처음 듣는 소리에 잠이, 아니 멍이 다 깼다. 태어나서 귀신을 본 적도 없고 무슨 신병을 앓은 적도 없는데 나한테 신내림이라고?
그 무당 말로는 신내림 받는 건 신병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신가물이라고 하는 뭐가 나한테 있다고 한다. 문득 10년 전 무당이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한테 신가물이 있는데 신내림 받을 정도는 아니고 대신 능력을 함부로 쓰지 말랬다. 능력은 무슨 능력? 어벤저스야 뭐야 초능력도 아니고 무슨 능력을 쓰지 말라는 거지? 신가물이 있는 사람은 촉이 좋아서 남이 못 보는 걸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걸 함부로 발설하면 큰 화를 입는다고 한다. 어라? 내가 가끔 말하다 보면 신들린 듯 뭔가 계속 말이 술술 트일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건가?
여하튼 그 신가물이 이제 10년이 지난 후에 기가 세져서 신내림을 받아야 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하니 아니고 조상님을 외칠 심정이었다.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평소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나는 향에 홀린 듯 극 감정적인 상태에 돌입했다. 평소 같았으면 신경은 쓰이지만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겠지
그런데 그 무당이 워낙 잘 본다고 하니,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건 안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분이 정말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내림 받으면 굿하는 비용은 어느 정도인지 물어봤다. 원래는 3천만 원인데 D.C 해서 천만 원에 해주겠단다.
"뭘 또 이렇게 파격적으로 할인을 해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뭔가 영업 냄새가 솔솔 풍겨서 일단은 생각을 해봐야겠다고 했다.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앞뒤 사방이 막혀있으니 계속 좌절을 할 거고 무엇보다 칼을 멀리하라고 했다. 그게 남을 죽이건 나를 죽이건 할 거니까 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거리낌 없이 내뱉는 무당이었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 점사를 궁금해하는 지인들과 카페에 모여 내가 들은 얘기를 해줬더니, 자기들한테는 다 좋은 얘기만 해줬는데 나한테만 왜 그런 얘길 한 건지 모르겠다면서도 이제 무당 되는 거냐며 낄낄대며 놀려댔다. 그래, 이게 찐친의 참모습이 아닌가.
통상 무당들이 과거는 좀 맞춰도 미래는 잘 못 맞추는 경향도 있고, 무엇보다 천만 원이나 들여서 굿판을 벌일 깜냥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 귀신도 안 보이고, 무슨 계시를 받은 것도 없는데 밑도 끝도 없이 신내림을 받으라니 받겠냔 말이다. 다만, 한참 일이 잘 풀리지 않던 시기에 몇 가지를 딱딱 맞추면서 그런 말을 하니 나도 모르게 믿어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설 연휴 내내 신내림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다 보니 결국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른 무당집에 가서 물어보자"
무당들이 돈을 잘 버는 이유가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겠지? 결국, 그 지인들을 다시 불러 모아 함평에 있다는 용한 무당을 찾아갔다. 연휴 끝나고 서울로 가기 전에 빨리 신내림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고 싶었고, 혹시 다른 무당도 나한테 신내림을 받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살짝 무섭기도 했다.
함평의 어느 조용한 가정집, 강아지 두 마리가 호갱들 어서들 오라며 세차게 꼬리를 흔들어댔다. 애견카페를 하는 동생 차에는 항상 강아지 간식이 넘쳐났는데, 그 간식을 꺼내어 강아지들 입에 물려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연세가 꽤 있으신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사고 쳐서 교무실에 끌려온 학생처럼 기가 죽어서 앉아 있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떤 무당이 저보고 신내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제가 신내림을 받아야 하나요?"
할머니는 기가 찬 듯 웃으며,
"대체 어떤 놈이 너한테 그딴 소릴 하디?"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신내림을 받아야 할 사람은 신당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안다고 했다. 고로 결론은 나는 신내림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참 유치하고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가. 어떤 근거도 없는 양쪽의 말인데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에 확신을 한다는 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한 마음을 지우기 위해 찾아간 곳이었고, 신내림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점을 보지 않는다. 그전에는 매년 한 번씩 점을 봤지만, 결국 무당도 모든 사람의 운을 점칠 수 없고, 내 과거를 일부 맞춘다 하여 미래를 본다는 보장도 없는 그 미신에 내가 그동안 경험한 것들을 제치고 완전히 믿어버리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냔 말이다. 물론 나는 귀신의 존재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실제로 귀신을 본 지인들도 있기 때문에 완전히 귀신의 존재가 없다고 믿기는 어렵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그런 무당의 말에 내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고, 결국 운명이 정해졌더라도 그냥 모르고 내가 직접 겪으면서 헤쳐나가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가끔 점을 보고 싶은 마음이 근질근질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무속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