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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호의를 베풀었더니 호구가 되었네

by 준비

편함이란 무엇이고 불편함이란 무엇일까?

뭐 이런 수준 낮은 질문을 던지느냐 할 수 있지만 인간관계 속에 이 두 단어가 들어가면 묘한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편함이란 긍정적인 상태, 즉 내 몸이 편안할 때 긍정적인 행동과 말이 나오고 상대가 나를 편안하게 할 때 그 사람에게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며 나 또한 그 사람에게 편한 사람이 되고자 행동하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이치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것이다.


편함이 만만함으로 변질되는 현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상대가 나를 어려워하지 않고 편하게 느껴지게 하기 위해 베푼 친절이 은인이 아닌 호구로 전락시켜 버리는 기묘한 현상.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뒤에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비위를 맞춰주는 모순들. 일관성 있는 태도가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버리는 상황들을 겪으면서 나는 더 이상 편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했다. 아니,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가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서 불친절한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식당이나 카페, 편의점, 백화점 등 어딜 가더라도 나는 공손하게 말하고 두 손으로 카드를 건네고 받는다. 어찌 보면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내가 잠시 몸을 담그고 있는 촬영 관련 일에서 스케줄 변동이나 딜레이 되는 것은 일상 다반사이다. 혹시 내 순서가 뒤로 밀려서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상황에서도 "싫은데요?"가 아닌 "괜찮아요. 편하게 일 보세요"라고 말을 했었다. 그렇게 서로가 어느 정도 이해하며 작업이 잘 마무리되면 나에 대한 이미지도 좋을 거고 그게 또 나중에 캐스팅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순간 내 순서가 뒤로 밀리거나 촬영 딜레이가 길어지는 상황에서도 나의 의사를 묻거나 진행 상황에 대한 양해를 부탁하는 경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이해해 줄 사람이 된 것이다.


반면, 가끔 촬영장에서 하나하나 따져가며 살짝은 예민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저러면 나중에 일이 안 들어오지 않나?"라는 우려를 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왕성하게 활동하며 캐스팅도 잘 되는 것이다. 혹시 순서 뒤로 미룰 수 있냐는 부탁에도 단호하게 "아니요. 저 뒤에 일정 있어요"라고 말하고 결국 내 순서를 뒤로 미루는 상황이 발생하고 나는 뭔가 억울하단 느낌을 받으면서도 아무 말을 못 했었다. 그리고 속으로 "에이, 그래도 내가 이렇게 양보해 줬으니 좀 미안해서 나를 좀 더 배려해 주겠지. 괜찮아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배려는커녕 오히려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서운한 상황이 발생한다.


내가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한 후 모든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아닌, 정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마지막에서야 들어주고, 현장의 미흡한 내용들은 친절한 어투로 조목조목 짚어주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나를 까탈스럽게 보는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불편한 사람이 되겠다는 건 상대를 괴롭히겠다는 의미라기보다 굳이 내가 해주지 않아도 될 일을 강아지 꼬리 흔들듯이 흔쾌히 들어주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료 컨설팅을 5년 넘게 하면서 고마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 순간이 끝나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사람들, 지속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태도가 돌변하는 사람들, 고마움보다 횡재했다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보며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낀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그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내가 먼저 나서서 무료로 해준다고 하거나, 돈을 빌리는 저 입장이 얼마나 난처할까를 생각해서 오히려 더 흔쾌히 빌려줌으로써 누군가의 ATM기가 되는 상황들을 겪으며 인류애는 점점 바스러져갔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불편한 사람이다. 불편한 사람이면서 끌리는 사람이다. 어딜 가나 당당하되 무례하지 않고, 허리 숙이지는 안 돼 친절함을 유지하고 상대방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입꼬리에 힘을 주며 말을 한다. 예전의 나였다면 움츠려든 어깨와 여러 번 고개 숙이며 인사하면서 헤픈 웃음과 과장된 미소로 편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었을 것이다. 상대 입장에선 후자가 더 편하고 좋을 텐데 신기하게도 결과는 전자가 압도적으로 좋다. 마치 연애와도 같달까. 상대방이 나에 대한 호감을 아낌없이 주면 너무나도 좋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늘 1순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사람 마음이 보일 듯 말 듯 하면 안달 나서 자꾸 신경 쓰게 되고 그 사람을 1순위로 두게 되는 심리. 물론 나는 반대의 성향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연애를 지켜보면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연애를 장기연애로 끌고 가는 비결이었던 것 같다.


사람은 각기 다른 재능을 갖고 있고, 각기 다른 에너지를 갖고 있다. 뭔 말이냐면 나 같은 사람은 타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어야 그나마 내 밥그릇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챙김을 잘 받는 사람들은 편한 존재로 남는 게 자기 밥그릇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부럽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가진 에너지가 그러한 것을. 다정하면서도 삭막한 이 사회에서 자기 성향에 맞는 생존전략을 찾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호의가 호의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내가 호구가 되는 현실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나의 생존법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도 나는 편한 사람이 좋다. 그의 호의를 호의로 돌려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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