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허무하게 가신다구요?
6개월 가량의 짧은 직영점 생활을 제외하고 나머지 재직 기간동안 나는 두 분의 팀장님을 모셨다. 대전지역에서 충남/충북지역과 전남/전북 지역을 다 커버했는데, 전남/전북 지역이 점차 커지면서 팀이 분리가 되면서 새로운 팀장님이 오셨다. 새로온 팀장님이 바로 나의 퇴사에 결정타를 날려주신 분인터라 딱히 남아있는 애정같은건 없었다. 대전 사무실에 계시던 한 팀장님. 그 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처음 나를 스카우트 해주신 한팀장님은 미운정 고운정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분이었다.
애초에 내가 갈 자리는 대리급 정도는 되어야 갈 수 있지만, 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잡기 위해 아예 신입인 나를 데려와서 자기편으로 만들 생각이셨던터라 내 입장에서는 행운인 상황이었다.
항상 아침마다 노트북에 이어폰을 꽂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던 절실한 크리스찬이셨는데, 성품 자체가 선한데 조직에 오래 몸담다 보니 너무 회사의 충신이 되어버린 분이었다. 물론 팀장이란 자리가 그럴 수 밖에 없긴 하지만 가끔은 왜 저렇게까지 하나싶기도 했는데, 가령 장거리 출장의 경우 60km가 넘으면 유류비가 지원이 되는데 당연히 실거리 수를 기준으로 측정이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지도를 가져와서 펼치시더니 자로 재면서 직선거리로 60km가 조금 안되니 이 지역은 출장비 청구에서 제외한다고 하셨다. 나름대로 회사에서 지출되는 비용을 아끼고자 하는 과한 충심이었다. 당연히 팀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팀장님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실제 주행 거리가 60km를 넘는데, 저 도로를 직선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근데 그게 불가능하다고 하시면 그 지역은 그냥 출장 안가겠습니다."
이 한 마디에 팀장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내가 출장 가는 대신 예비 창업주보고 오라고 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에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리고 팀장님은 그 날 조촐한 회식 자리에서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로 스트레스를 주는 팀장님이셨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팀장님을 미워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왜 저럴까 정도의 마음? 네 식구를 먹여살리는 가장의 무게란게 그런 것 같다. 법인카드를 쓸 수 있는 회식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술값이나 밥값은 다른 두 대리님의 몫이었다. 팀장님이 구두쇠인 반면에 두 대리님은 늘 혀를 끌끌 차면서 본인들이 계산을 했다. 그런게 눈치보일 법도 한데, 눈치 빠른 팀장님이 그걸 모를리는 없고, 회사원 월급으로 두 자녀를 키우는게 쉽지 않았기에 팀원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보다는 가정을 선택하신게 아닌가 싶다.
사람 자체가 교활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면 죄책감 없이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본디 선한 사람이라는게 너무나 선명히 보이다보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작은 키에 하얀 피부에 네모난 안경을 쓰고 영혼없는 너털웃음이 기본으로 장착된 분이었다. 지원부서다보니 다른 부서와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본래 내성적인 성격인데 그렇게 노력하시는거라고 했다. 그래서 뭔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일에 돌입할 땐 굉장히 샤프하고 날카로워서 업무적으로는 배울게 많은 분이었다. 차라리 그런 스탠스를 계속 유지하셨다면 오히려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내가 퇴사하기 1년 전 쯤, 한팀장님이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사고를 친것도, 실적이 안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원래 권고사직 대상은 한팀장님이 아니였다. 광주 사무실에 있는 다른 차장님이 권고사직 대상이었고, 상무님 면담중에 돌변해서 그냥 이렇게는 나갈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셨다고 한다. 하긴, 다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인데 누가 그걸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도 회사의 입장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진행되는게 일반적일텐데 그런 반응에 상무님이 적잖이 놀라셨다는 얘길 들었고, 그래서 타겟이 한팀장님으로 바뀐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쓸데없이 착해빠진 팀장님은 자기를 쳐내는 상무님의 결정을 충신의 마음으로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어찌난 답답했던지...
그렇게나 가정을 생각하면서 왜 그럴때엔 반항 한 번 못해보고 그걸 그대로 따랐을까. 결국 상무님도 누군가를 해고해야 하는 입장에서 명확한 기준을 갖고 진행하는게 아니라 처음에 권고사직 대상자였던 그 차장님이 난리를 쳤을 때 혹 자기에게 불똥이 떨어질까를 염려해서 그런 결정을 한게 아닌가. 한팀장님은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그 결정을 받아들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테니까. 누구보다 자기에게 헌신하고 단 한 번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던 그런 부하직원을 그렇게 보내버린 것이다. 결국 자기가 살기위해선 냉정해 지는게 사회 생활인걸까. 그래서 나는 "가족과 같은 문화" 라는 말이 나오면 코웃음을 치게 된다. 결국 각자도생일 뿐 가족과 같을 순 없다는걸 20대에 알아버렸다.
그런 맥락에서 자기가 전에 데리고 있던 직원 진급시키려고 현재 자기 팀원인 내 평가를 낮게 줌으로써 자기 사람을 챙겨버리는 일도 생기는 거겠지. 아무튼 한팀장님은 그렇게 허무하게 회사를 떠나셨다. 과장에서 차장으로 진급할 때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차장으로 진급한지 1년 조금 지나서 백수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셨지만 대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간 것이니 축하할 일만은 아니였다. 그래서 한팀장님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시린 부분이있다. 그냥 팀장님 시키는 일을 다 오케이 하고 잘 따라주는 나였다면 미안함이 덜했을까.
회사에 그 누구보다 충심을 다했던 한팀장님의 마지막은 너무도 허무하고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