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이성 분리
대전 사무실에서 1년가량 업무를 배운 뒤 나는 광주 사무실로 발령받았다. 그 당시 광주 지역은 큰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광주/전남 지역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는 게 아닌 대전 사무소에서 광주/전남 지역까지 맡고 있었다. 그래서 두 명의 직원이 광주 사무실에서 상주하며 광주/전남 지역 담당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대전을 가서 회의를 하는 형태였다.
광주 사무실에 있는 나의 선임은 길대리님은 대전사무소에서 나를 극진히 챙겨주는 이대리님의 동기인데, 회사 내 소문이 자자한 오지라퍼였다. 사교성의 끝판왕이자 마음도 여린 그런 분이셨는데 이대리님이 어찌나 내 칭찬을 했는지 우스갯소리로 내 실력을 체크해 보겠다고 하셨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이대리님만큼이나 나를 많이 챙겨주셨는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이대리님은 그냥 자식처럼 무한정 애정을 쏟아주셨던 분이라면, 길대리님은 예뻐해주긴 하나 이상한 걸로 한 번씩 트집 아닌 트집을 잡는 경우가 있었다. 소위말하는 짬차이가 엄청나게 나기 때문에 뭐라 하든 "네! 알겠습니다"를 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작은 마찰이 있었달까.
가령, 영업팀 누군가가 길대리님한테 "길대리님~후배 교육 좀 시키세요. 왜 이렇게 애가 콧대가 높게 행동해" 이런 식으로 말을 했는데, 길대리님이 나를 불러서 그 얘기를 해주셨다.
"사무실에 영업팀 회의차 직원들 들어오면 가서 먼저 인사도 하고, 커피 한 잔 하자고 먼저 말해라. 너무 네 일만 하지 말고"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매주 월요일 영업팀 회의 때문에 영업팀 부서 사람들이 현장에서 사무실로 죄다 들어오는데 그 인원만 50명이 넘는다. 어떻게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인사하고 커피 마시자고 하겠나. 그냥 사무실 들어올 때 전체적으로 들리게 "안녕하세요~" 하고 마는 거지. 그리고 굳이 할 말도 없는데 가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하는 것도 나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나 같은 스타일이 소위말하는 대한민국의 전통 조직사회에서는 거슬리는 존재일 수도 있다. 아니 맞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를 입에 달고 사는 인팁이었기에 그 대리님께도 "왜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요?"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근데 대리님, 그 말을 대리님께 해준 A대리님이 대리님보다 후배 아닌가요? 어떤 후배가 예의 없이 자기보다 선배한테 그런 말을 하나요? 대리님은 그걸 듣고 기분 안 나쁘셨어요? 그리고 제가 대리님 팀원인데 그런 말을 하면 우리 팀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는 게 맞나요 그걸 저한테 그대로 전해주시는 게 맞나요?"
길대리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지만 또 내가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니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은 안 나오는 그런 상황과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몇 달 후에 길대리님이 이상한 스탠스를 취하셨다. 앞으로 업무 진행할 때 자기한테 물어보고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각자의 담당 지역이 다른만큼 서로의 영역에 대해 어느 정도 지켜줘야 하는 선이라는 게 있지만 그걸 무시하고 신입사원 대하듯 하는 그런 태도였다. 살짝 불쾌했고 귀찮았지만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내가 하는 일이 편의점 창업 컨설팅 업무다 보니, 어떤 점포 계약을 할 때 회사 내에서 지원할 수 있는 지원금 산정 기준이 있고 그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지원 가능한 최대 금액과 실 지급액을 산출한다. 대리님께서는 일을 할 때 다 물어보라고 하셨기 때문에, 모 점포 계약건 관련 진행 상황을 보고하면서 지원금 산출에 대해서도 '산정 기준에 따라 이렇게 하면 되죠?'라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길대리님은 "하~넌 지금 이 일 한지가 언젠대 아직도 이걸 몰라서 물어봐?"
...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너 아직도 업무 숙지가 덜 된 것 같은데, 내가 팀장님께 보고해서 너 쪽지시험이라도 봐야겠어"
이게 내 뚜껑을 열게 하는 트리거였다.
"대리님께서 지난번에 다 물어보고 하라고 하셔서 물어본 거고 이 내용을 제가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닌데요?"
"아니, 너 아직 부족한 것 같아. 팀장님께 보고해서 쪽지 시험 볼 거니까 준비해"
"네? 제가 지금 이 일을 한 지 3년 차인데 그런 거 보는 건 자존심 상해서 싫은데요? 그리고 제가 업무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 월권행위인 거 아시죠?"
"뭐?... 하... 일단 팀장님께 전화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네~전화하세요. 그건 대리님 자유니까 제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죠. 근데 저도 팀장님께 말씀드려서 쪽지시험은 절대 안 볼 거라고 말씀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대리님은 대리님 하고 싶은 대로 하시고, 전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죠."
그리고 대리님은 팀장님께 전화를 해서 해당 상황을 말했고 담배를 태우러 나가셨다. 그때 대전에 계신 이대리님한테 전화 와서 "야~너 길대리랑 무슨 일 있어?"라고 걱정하듯 물으셨다. 나는 오늘 있었던 상황들을 설명드렸고 이대리님은 기가차다는 듯 "아니 그 자식은 할 일이 그렇게 없대?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야 걱정 마. 어차피 팀장님이 길대리한테 허튼소리하지말고 일이나 하라고 했다고 하더라. 너 길대리랑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요.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이때의 해프닝 이후로 6개월 정도 흘렀을까? 길대리님이 퇴사를 하신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나는 소식을 좀 늦게 전해 들었는데 그게 송별회 날이었으니 거의 마지막에 들었다고나 할까? 뭐 퇴사야 자기 선택이니 짠하게 볼 일도 아니고, 더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 떠나는 거니 우울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발팀에서 2만 원씩 걷어서 작은 선물이라도 사자라고 해서 나는 그냥 따로 준비하겠다고 말하고 급하게 신세계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래도 몇 년을 같이 일하고 나름 나를 많이 챙겨주셨던 분인데 2만 원에 작별인사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달까. 적어도 새로운 곳으로 가서 더 좋은 일 있길 바라는 맘으로 백화점 1층에 있는 페라가모 매장에 가서 반지갑을 샀다. 그리고 송별회 가기 전에 전해드렸는데, 사실 그때 알았다. 대리님과 다툰 그날의 일을 다른 부서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개발팀 한 선배가 와서 내가 산 지갑을 보더니 토끼눈을 하며,
"와~이거 네가 산 거야? 너 대리님이랑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네? 제가 왜요? 저 길대리님 좋아하는데요?"
"아니, 저번에 둘이 한바탕 했잖아. 그래서 우리는 너랑 길대리님 사이 안 좋은 줄 알았지"
"아~그건 그냥 의견 차이인 거고 길대리님은 좋은 분이잖아요. 전 길대리님 좋아합니다 하하"
사람들은 그때 그렇게 다툰 게 나름 충격적이었나 보다. 한참 어린 후배가 선배한테 대든다고 생각하는 그런 거였을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사람을 싫어할 때엔 나와 갈등관계에 있느냐가 아니라 사람을 어떤 마인드로 대하느냐를 보는 편이다. 즉, 길대리님은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도 어떤 감정의 영향을 받아서 본래 모습과 다른 행동을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게 그때의 해프닝이었던 거고, 그건 하나의 사건이지 길대리님을 평가하는 주요 요소가 되지 않는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고, 길대리님을 미워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팀 선배가 그 말을 했을 때 살짝 갸우뚱했던 것이다.
내가 4차원인 건가? 사람들은 나에게 4차원이라고 하지만 나의 기준에서 말하자면, 왜 사람들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걸까 라는 생각이다. 내가 만약 조직에서 사랑받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나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점포 계약하고 피눈물 흘릴 사람이 여럿 생겼을 것이다. 대신 내가 그들 기준에서 괴짜느낌의 후배로 일을 했기에 나 때문에 피눈물 흘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대신 팀장님이 피눈물을 흘렸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다. 나는 이상한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