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택일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을 동경하며, 어떤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을 칭송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자 더 높은 목표를 꿈꾼다. 그런데 과연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게 꼭 좋은 것일까? 20대 청춘의 대기업 생활은 이런 부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조직의 목표와 나의 가치관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했다.
성과를 낸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모든 일에는 운이 따라야 하듯 어느 정도 운도 따랐겠지만 본인 스스로도 부단히 노력했기에 그 결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더욱더 열심히 일을 하게 만드는 자양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 부단히 실적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나는 나의 가치관과 조직의 목표와 충돌하는 상황들을 맞이하게 되었고, 결국 나의 가치관을 선택함으로써 인정받는 회사원의 삶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편의점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편의점 가맹 사업을 설명해 주고, 기존점이나 신규점등에 대한 소개를 해주는 컨설턴트 업무였다. 정해진 계약 조건을 설명하고, 점포 투자금액부터 예상 수익까지 산출해서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보여주는 일이기에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을 매칭해 주면 되는 일이다. 실적도 나쁘지 않게 나왔다. 그러나 조직생활을 해 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결코 회사는 이로운 행동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가령, 나의 MBO 평가 항목 중에는 특별지원금 지급률에 대한 것이 있다. A라는 사람에게 100만 원까지 지원할 수 있는 기준이 있지만 그 돈을 80만 원을 지원해 주면 회사는 20만 원의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그 비율만큼 나의 평가는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휴대폰이나 자동차 구입 등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100만 원을 받지만 누구는 50만 원을 받기도 하고 우리는 그런 상황을 겪었을 때 전자의 경우 뿌듯함을 느끼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된다. 금액 규모를 키워보자
통상 편의점에서 특별 지원금을 줄 수 있는 점포들은 저매출 점포들이다. 매출만으로 얻는 수익이 너무 낮기에 본사에서 특별지원금을 줌으로써 운영 보조를 해 주는 것인데, 그 금액이 월 40~60만 원 수준이다. 1년이면 480~720만 원이 된다. 그럼 6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점포에 40만 원을 지원해 주면 나는 회사에 1년에 240만 원의 이익을 지켜준 사람이 된다. 그런 점포들 여러 개가 쌓이면 나름 상당한 금액이 된다. 그게 나의 능력을 평가하는 항목 중 하나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는 받을 수 있는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이고, 사실상 회사 돈이고 지급해도 되는 돈이지만 나의 실적 하나 때문에 누군가의 생계에 조금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정도는 사람에 따라 그럴 수 있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떨까. 회사에서는 점포 수를 늘리기 위해 매출이 다소 저조하더라도 공격적으로 출점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루 10시간씩 주 6일 근무하고 월 100만 원도 못 가져갈 수 있는 점포도 수두룩하다. 결과론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담당자 입장에선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점포들도 있다. 그 점포를 누군가와는 계약을 해야 한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희망적인 메시지들을 곁들여 사람들을 현혹해서 빠르게 계약을 체결하면 소위 말하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일 잘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고작 실적, 인정? 이런 것들이지만 누군가는 인생이 걸릴 수도 있는 문제다. 그 누군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계약을 체결하는 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희망적인 메시지에 잘 현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점포를 차마 소개를 하지 못하고 계속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이건 회사에서 출점하면 안 되는 점포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로 팀장님과 크게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네가 회사원인데 회사 이익을 따져야 되는 거 아니야?"
팀장님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그건 회사가 출점하면 안 되는 게 맞죠. 누구 인생 조지는 거 아닙니까?"
나도 흥분해서 말이 과격하게 나갔다.
"너 월급 누구한테 받아?! 그리고 그 점포가 매출 안 나온다는 근거 있어?"
맞는 말이다. 오픈하기 전에 매출을 100% 장담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장담은 못하죠. 근데 솔직히 팀장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 자리는 영 아닌 거. 그렇게 좋은 점포면 팀장님 가족분 시키세요. 근데 그건 싫으시죠? 내 가족은 손해 보면 안되고 남의 가족은 손해 봐도 상관없으니까요"
나도 참 조직에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팀장의 권위고 뭐고, 누군가의 인생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냥 막대기로 휘젓듯 생각하는 그 태도가 나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지점이었다. 그때 나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같다. 내가 회사를 오래 다니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것을...
어찌 되었건 그 점포는 계약이 되었다. 내가 소개하지 않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계약이 이뤄졌다. 역시나 오픈 매출은 처참했고, 그 점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는 어디선가 피눈물을 흘리며 편의점 회사를 욕하며 다시는 쳐다도 안 볼 사업이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냉정하고 잔인하거나, 그냥 이런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리는 무던함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굉장히 불편한 부분이다. 그냥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으로 여기고 넘어갔지만 사실 사람들도 알고 있다. 누군가는 나의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본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그걸 깊이 생각하지 않고 덮어버린다. 깊게 생각하면 결국 본인이 나쁜 놈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일한다는 것, 조직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런 부분에 깊이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조직에서 인정받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MBO평가는 늘 A를 유지했다. 다른 항목에서 더 높은 성과를 내면 되는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누구보다 조직에서 인정받고 싶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열심히 달리다 마주친 불편한 현실 앞에서 나는 인정보다 자기만족을 선택했다. 그 사람들은 몰라주겠지만, 적어도 내가 회사를 나가고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마주쳤을 때 욕은 먹지 않는 삶. 다시 20대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겠지? 아무래도 나는 회사원의 삶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희망적인 이야기 다 빼고 있는 그대로만 말해줘서 꼭 한 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담당자분 믿고 이 회사랑 하기로 했어요."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왜 이 한 마디가 그리도 가슴속 깊이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