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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노예가 된 者의 삶

인정받는 노예는 있어도 존중받는 노예는 없다

by 준비

"한 팀장! 정말 미안하게도 회사가 구조조정을 해야 해서 자네가..."

"... 네... 알겠습니다"


미련할 정도로 회사의 충신이었던 한 팀장님의 마지막이었다. 회사가 구조조정을 해야 할 때 결국 누군가는 나가야 하는 상황이기에 내가 모시던 팀장님이 그 대상이 되었다고 하여 억울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기에 나는 회사에, 아니 그 말을 한 정 상무에게 치가 떨렸다.


한 팀장님은 팀원 입장에서 존경할만한 팀장님은 아니었고, 뒤에서 욕도 많이 했지만, 그 심성이 여린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미워했던 적은 없는 분이다. 상무로부터 반 강제적 퇴사 통보를 받았을 때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그 결과를 받아들인 착한 사람이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기에 마치 그 말을 전하는 왕의 심정을 헤아리는 충신처럼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런 모습이 한 편으로는 멋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적어도 내가 흑막을 알기 전까지 말이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원래 권고사직 대상자는 다른 팀장님이었다. 그러나 그 팀장은 권고사직 얘기를 듣자마자 거세게 반발하며 그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비리 등을 하나씩 내뱉으며 이대로 곱게 나가진 않겠다고 상무님에게 쏟아냈다고 한다. 그런 반응에 상무님은 적잖은 당혹감을 느낀듯했다. 그리고 그게 현실로 일어났을 때 본인에게 혹시 모를 불똥이 튈 수 있지 않을까를 걱정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 타깃을 찾게 된 거고 어리석을 정도로 상무님에게 순한 양이었던 우리 한 팀장님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만약 한 팀장님이 그 팀장님처럼 거세게 저항했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결국 누군가는 나갔어야 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게 나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것은 생존과 관련된 문제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고사직 대상자를 선정할 때 객관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해야 함에도 거세게 저항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움찔해서 다음 대상자를 찾는 행위 자체의 모순에 나는 역한 감정을 느꼈다. 한 팀장님이 그렇게 퇴사를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대리 진급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회사의 충신 혹은 노예가 된다. 대리정도만 되더라도 이직의 기회가 있지만 과장급 이상으로 가면 사실상 이직의 기회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눈앞에 놓은 선택지는 회사에 대한 충성 말고는 없다. 더 높이, 길게 회사를 다니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팀원들과 팀장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편의점 창업 컨설팅 업무를 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추진하는 점포 중에서 절대 오픈하면 안 될 수준의 점포도 오픈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리고 나는 그 점포를 누군가에게 소개해야 한다. 그럼 나는 절대 소개하지 않았고, 그게 새로 온 팀장님과의 갈등 중 하나였다. 회사에서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 팀장 입장에선 그 점포를 누가 계약을 해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건 말건 관심사가 아니다. 오직, 이미 회사에서 거액을 들여 공사를 진행하고 선계약을 통해 월세를 주고 있는데 텅 빈 점포로 두고 있는 건 윗 분들의 심기에 거슬릴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팀장 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를 하게 되고 거기에 딱히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조직생활과 맞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이다. 회사가 그 길을 가지 않으면 될 문제인데, 굳이 리스크를 무시하고 앞으로 가고 누군가는 그 리스크를 해결해 줘야 하는 것이다. 뭘로? 제3자의 희생으로 말이다. 충신이라면 자기 목을 걸고 강하게 소신을 말하겠지만 노예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인정을 받아서 자기 생계를 좀 더 연장하면 될 일이다. 그래서 충신이 아닌 노예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가족 같은 회사? 전 회사랑 저랑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생각하는데요?"


20대 어린 신입사원이 저런 말을 하고 다녔을 때 선배들이 얼마나 별종이라 생각했을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우리가 존중과 배려를 기반으로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가족인지 비즈니스 파트너인지 말이다. 가족 같은 회사라면 회사가 좀 어렵더라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임원들 연봉을 삭감한다던가 또는 실적을 낼 수 있는 혁신적인 방안들을 모색하는데 집중해야 정상이 아닌가? 언제부터 가족의 의미가 어려우면 내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일까? 가족에게는 내가 좀 짜증을 내도 이해해 주지만 비즈니스 파트너에겐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렇기에 회사와의 관계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생각하는 건 별종 같은 생각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과 존중을 할 수 있는 대상이란 것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에 조금씩 물들어가면서, 내가 하는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고 있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그래야 본인이 편해질 것이니까. 나 또한 살면서 그런 부분이 아예 없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런 부분에 대해 경계하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테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행위도 조심해야 한다. 똥 묻는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도 문제지만 겨 묻은 개가 똥 묻는 개를 조롱하는 것 또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예가 아닌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대갓집 양반 나으리에게 노예는 존중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일 잘하면 나에게 도움이 되니까 잘 쓰는 도구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쓸모가 다 하면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내가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 회사가 나를 노예로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언제든 이 조직을 떠나서도 본인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부당한 상황에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으며 본인의 신념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2024년 12월 12일이다. 1203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하다. 권력자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수많은 엘리트들의 선택을 보며 무엇을 느끼는가? 부귀영화를 위해 본인의 신념과 생명의 가치, 헌법의 가치, 민주주의 가치 모든 것에 침묵해 버린 그 행위가 옳다고 생각하는가? 그게 옳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 그건 개인의 선택이니까. 그러나 나는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아무도 내 삶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나를 알아주기 때문에 상관없다.


돈은 벌어서 채울 수 있지만, 무너진 신념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 다만 자기 합리화를 통해 무너지지 않은 것처럼 위장할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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