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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간신배 때려잡는 오지라퍼

by 준비

"준비씨~ 준비씨는 우리 회사랑 안 맞는 것 같아~"


회사 재직시절 유명한 간신배로 소문난 김 과장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 김 과장은 영업팀, 나는 개발 지원팀에 있었기 때문에 김 과장에 대해서 잘 몰랐다. 가끔 업무 협조 요청하면서 몇 마디 나누는 정도였기 때문에 그냥 상냥한 사람이라는 정도의 인식만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실체를 보았을 때 적지 않게 놀랐다고나 할까.


내가 김 과장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은, 이제 내가 광주 지사로 발령받아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김 과장은 조직문화팀이라는 곳으로 발령받아서 각 지방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회사가 추구하는 조직문화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 감독했다. 말이 감독이지 지역팀에 있는 부장들에게 살랑살랑 꼬리 흔들며 엄청난 아부를 하기에 바빴다.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아부를 잘하는지 처음 알았고, 저렇게 티 나게 아부를 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부쟁이들을 싫어하지만 실상 윗사람들은 아부쟁이를 좋아한다. 그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일단 자기한테 철저하게 복종하고 비위를 맞춰주기 때문에 싫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성적이고 차가운 카리스마를 가진 당시 부장님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표정을 보고 "역시 사회생활은 아부가 최고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딱히 다른 사람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고 나랑 결이 완전히 다른 유형이니 굳이 말을 섞을 필요도 없고 마주치면 가식적인 미소로 인사하는 정도의 사이였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정말 뜬금없이 저 말을 툭 내뱉은 것이다.

회사 특성상 영업팀은 거의 외근직이므로 사무실에 상주하는 인원은 몇 안된다. 그런데 월요일은 영업팀 회의가 있는 날이기에 사무실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꽉 차서 엄청 시끌벅적하다. 주간업무보고 작성을 하고 출력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프린터로 가려는 그때 내 자리 건너편에서 김 과장이 부른다


"준비씨"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네?"

(정해인 같은 환한 미소로) "준비씨는 우리 회사랑 안 맞는 것 같아~"


저 뒤편에선 회의 준비하느라 시끌벅적한 가운데 내 반경 1미터 내에 있는 직원들도 그 소리를 듣고 나와 김 과장을 조심히 번갈아 보며 숨을 죽였다. 김 과장보다 높은 사람이 없었기에 이 황당한 상황에서 "뭔 개소리야 김 과장!" 해 줄 사람이 없고 그저 정적만 흘렀다. 꽤나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1초? 정도의 정적이었을 뿐이었다. 왜냐면 나는 김 과장의 말을 듣고 "저 병X 새끼가 뭐라는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이 감정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드라마 이브의 서예지처럼 초승달 눈웃음과 광대까지 끌어올린 입꼬리로 "감사합니다?"를 내뱉고 유유히 출력물을 찾으러 걸어갔다. 그 순간 주변에서 들린 "풉" 소리와 급격히 굳어진 김 과장의 얼굴을 보며 어찌나 백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를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같은 팀 선배 두 명이 쪼르르 달려와서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박장대소하면서 "와~진짜 너는... 이거다 이거"라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내심 그들도 그 과장의 과도한 아부행위가 거슬렸던 것이다. 근데 이런 김 과장을 때려잡는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장교 출신이자 극강의 ENFP 텐션을 가진 오지라퍼 권 과장님이 있었다. 주변을 항상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신 권 과장님에게 오지라퍼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달 뒤 김 과장이 또 우리 사무실을 방문을 했고, 부장님과 단 둘이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던 것 같다. 근데 굳이 부장님은 나랑 권 과장님 그리고 다른 여직원 한 명을 데리고 인근 중국집으로 갔다. 역시나 김 과장은 중국집까지 가는 그 순간부터 도착해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부장님께 간과 쓸개를 다 내어줄 것 같은 아부를 떨어댔다. 그러다가 부장님께서 아무 말 없이 땅콩이랑 짜사이만 주워 먹고 있는 나를 보며 "준비씨 평소에 축구 같은 운동 좀 하나?"라고 물어보셨고, 나는 급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아... 네... 예전에는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거의 안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

갑자기 테이블 아래로 김 과장이 내 발을 툭 친다. 요즘에는 헬스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를 말하려던 나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순간 황당하여서 속으로 "뭐지 이 새끼?"라고 생각하면서 쳐다봤다. 자기 혼자 계속 부장님 하고 말해야 하는데 내가 말을 하니까 거슬렸는지 그만 말하라고 친 게 아닌가 싶다. 진짜 다시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놈이다. 여하튼 눈치 빠른 권 과장님은 말을 하다 멈추고 잠시 생긴 그 정적을 깨면서 치고 들어오셨다.


"어이쿠 김 과장 너 왜 준비 발을 치고 그래~축구는 공을 차야지 공을~ 하하하하"

"아! 부장님 저번에..."


권 과장님의 독무대였다. 마치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표정과 특유의 하이톤으로 분위기를 압도해 가면서 토크쇼 MC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 과장은 급격히 표정이 굳어져 갔다. 간신배들을 때려잡는 건 대립이 아니라 묻어버릴 정도의 하이텐션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속으론 다 알고 있지만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김호영 같은 하이텐션으로 끌어올려를 외치며, 일체의 아부를 묻어버리는 것. 정치를 하려면 속에 구렁이 열 마리씩은 넣고 다녀야 한다는 말처럼 사내 정치도 역시 능청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20대 후반에 알게 되었다.


퇴사 후 김 과장을 볼 일은 다시는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어이없게도 10년 전쯤 강아지 산책시키러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다 딱 마주쳤다. 회사 사람들이 있는 자리였다면 가식적인 환한 미소로 나에게 인사했겠지만 뜬금없이 문래동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마주치니 적잖이 당황하면서 인사를 건네던 그였다. 초승달 같은 눈매와 광대까지 끌어올린 입꼬리에서 눈만 맑은 눈의 광인 버전으로 바꾸고 "아~안녕하세요~네~" 하고 지나갔다. 잠시 불쾌했지만 귀여운 태양이를(반려견 이름) 보며, 기분 전환을 하며 유유히 산책을 했다.


그가 잘 살지 못하길 바라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잘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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