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차원이 아니라 고차원인데?
"팀장님 제가 왜 10분 전에 출근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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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59분 세이브! 휴우 다행히 지각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그다지 힘차지 않은 목소리로 "좋은 아침입니다"를 외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내 맞은편 앉은 팀장님 표정이 좋지 않다.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니까 나름 팀장님도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을 것이고,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준비씨... 우리가 공무원도 아니고 매번 9시 다 되어서 도착하는 거 고쳐야 하지 않겠어?"
"팀장님, 저랑 회사랑 계약한 시간은 9시인데요?"
"아니, 그게 지금 회사원이 할 소린가? 무슨 계약을 운운하고 있어"
"전 9시까지 오려고 7시 30분에 일어나서 준비하거든요? 근데 팀장님은 8시에 일어나셔도 8시 30분까지 오시잖아요? 부지런함의 기준이 도착 시간 기준인가요 기상 시간 기준인가요? 일찍 온다고 돈 더 줄 거 아니잖아요. 근데 제가 지각한 것도 아닌데 왜 더 일찍 와야 하는 건가요?
팀장님은 자포자기한 듯했고, 나 역시 이미 실적을 잘 뽑고 있었고, 업무 처리하는데 일찍 올 필요도 없는 명분이 있었기에 좀 강하게 나가기도 했다. 나름 눈치가 빠른 편이라 이런 문제가 팀장의 심기를 거스를 걸 모르지도 않았다. 그냥 알면서 그렇게 한 거다. 다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잘 보이기 위해 조기 출근과 야근을 할 맘이 없을 뿐이었다. 심지어 진급으로 엿 먹인 팀장이 저런 소릴 하는 게 어이없을 뿐이었다. 신기한 건 이런 어색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팀장과는 나름 잘 지냈다. 정말 서로가 여우처럼 딱 회사원으로써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실적 외에도, 다른 팀 팀장님들 중 나를 굉장히 예뻐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던 것도 한 몫했다. 그중에서 진팀장님은 영업팀 차장님인데 나를 좀 예뻐해 주셨다. 그리고 개발팀 김팀장님도 나를 예뻐해 주셔서 얼른 자기 팀으로 오라고 여러 번 러브콜을 보내셨지만 그 팀은 분위기가 너무 힘든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사양하고 있었는데, 항상 "우리 준비는 일을 참 잘해"라는 말을 해주셔서 내 어깨에 힘을 실어주셨다.
어느 날 진팀장님께서 술자리에서,
"준비(가명) 얘는 팀장만 잘 만나면 날개 달고 날아다닐 애인데, 얘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서 지금 팀장이랑 저러는 거야. 야! 너 내가 키워줄 테니까 우리 팀으로 와"
"어? 팀장님 근데 전 다시 서울로 가고 싶고, 영업팀은 저랑 안 맞아요 ㅠㅠ"
"야 인마! 너 영업팀 안 돌고 계속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회사는 영업팀 근무는 필수야. 그냥 우리 팀으로 와"
"근데 팀장님 담당 지역은 여수잖아요. 광주 아래로는 가기 싫어요 헤헤"
"야, 어차피 나도 곧 있음 서울 갈 건데, 여수에서 한 1-2년 돌다가 같이 서울 가면 되지 인마"
"전... 영업팀이랑은 안 맞아요. 다른 부서로 가셔서 불러주세요 하하"
단호하게 거절하긴 했지만 나름 챙겨주려고 하는 그 마음은 굉장히 감사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퇴사 후에도 생각나는 사람 중 한 분이다.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얼큰하게 취하신 팀장님은 다시 나에게 탄식하듯 말씀을 하셨다.
"야, 너 자꾸 부장님 퇴근하기 전에 퇴근하지 마라! 눈치 좀 보고 살아 인마"
"팀장님? 전 제 업무를 다 끝냈는데 왜 집에 가면 안 되나요? 어차피 다들 부장님 눈치 보느라 퇴근 못하고 웹서핑 하고 있는 거 뻔히 아는데 그거 너무 시간 낭비잖아요"
"야, 그걸 누가 모르냐. 너 진짜..."
"근데요 팀장님. 팀장님 아들이 나중에 회사에 들어갔는데 퇴근 시간인데 눈치 보느라 퇴근 못하고 늦게 오면 너네 회사는 참 좋은 회사구나 하실 거예요? 아니잖아요? 그럼 팀장님 아들은 칼퇴하길 바라고 남의 자식은 늦게 퇴근하길 바라는 건 내로남불이죠"
"..."
"그리고 제가 늘 칼퇴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문서보관실 공사하면서 저 서류들 정리하는 거 저 혼자 한 거 아시죠? 저거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잖아요. 근데 저게 정리되어 있다는 건 제가 야근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냥 전 티 내면서 일하는 게 싫어서 남들 칼퇴하는 날 혼자 남아서 야근한 거예요. 팀장님이라면 그런 걸 봐주셔야죠"
"아이고, 진짜 너는 4차원이야 4차원 허허"
"에이, 전 4차원이 아니라 고차원이죠 하하"
꽤나 무례한 말일 수 있지만 그 팀장님과 나름 유대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저렇게 말 한 부분도 있고, 사실 내 얘기가 틀린 부분은 없으니까 팀장님도 더 이상 뭐라고 하시진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눈치를 좀 보면서 회사생활을 하길 바라는 아끼는 마음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티 내면서 일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열심히 한다는 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 팀에 있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대리님은 별 것도 아닌 걸 할 때마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데 그게 그렇게 보기 싫어다. 근데 시간이 좀 지나면 사람들은 저 대리가 되게 일을 많이 하는 거라고 알게 된다. 그런 게 사회생활이라는 걸까? 나랑은 좀 맞지 않고, 그래서 어찌 보면 나는 조직에서 인정받기 힘든 타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어떤 날에는 같이 일하는 최고참 대리님이 굳이 모든 업무를 자기한테 물어보고 진행하라고 하셨는데, 그 대리님은 회사에서 소문난 오지랖 대마왕이었다. 그래서 한참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엄청 잘 챙겨 주셨다. 근데 그날은 좀 예민하셔서 그런지 여하튼 나에게 그런 이해 안 되는 지시를 하셨고, 일단 시킨 거니까 모든 업무 진행하면서 일일이 물어보고 진행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준비씨, 지금 업무 한 지 꽤 됐는데 이런 기준도 몰라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네? 저 아는 건데 대리님이 다 물어보고 진행하라고 하셔서 물어본 건데요?"
"흠... 아니야. 내가 볼 때 아직 미숙해. 팀장님께 보고해서 너 업무 기준 쪽지시험 좀 봐야겠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발언이었다. 각자 맡은 지역이 다르고 각자 업무를 수행하는 담당자인데 업무 기준과 관련한 쪽지시험?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전 보기 싫은데요?"
"아니, 내가 팀장님한테 보고 하고 너 시험 보는 걸로 진행할 거야"
"그럼 대리님은 그렇게 하세요. 전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시험 못 본다고 말씀드릴게요. 전 절대 안 볼 거거든요"
대리님은 말문이 막혀서 줄담배를 피셨고, 나는 동태눈을 하고 흐린 눈의 광인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그 대리님의 동기이자 나를 굉장히 예뻐했던 다른 대리님한테 일러바쳤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대리님은 "아 그 새낀 뭘 그런 쓸데없는 걸 시키고 있어. 야 하지 마하지 마 내가 팀장님한테 말해줄게"
그렇게 그 문제는 아무 일 없이 넘어갔지만 그 광경을 본 다른 부서 직원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왜냐면 나랑 그 대리님 연차가 엄청나게 나기도 하는데 그렇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니 사이가 안 좋다고 소문이 났다. 그 일이 있은 1년 후 그 대리님이 회사를 그만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 대리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1도 없었고, 다른 회사에 가셔서도 돈 많이 버시라는 의미로 백화점으로 달려가 명품 지갑을 사 왔다. 다들 2만 원씩 걷어서 퇴사 선물을 사주는 모습에 "가족 같은 사이 운운하더니 꼴랑 2만 원씩 걷어서 선물을 산다고? 그게 가족이야?"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여하튼 환송회 자리에서 내 선물을 보고 모두가 좀 놀란 표정이었다.
"너 저 대리님이랑 사이 나쁜 거 아니었어?"
"네? 전 이대리님 좋아하는데요? 잘 챙겨주셨잖아요"
그때 그 사건은 그냥 살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작은 갈등 정도이지 그런 걸로 사람을 싫어하거나 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나?
이 외에도 다양한 일들이 있지만 회사에서 나는 좀 4차원의 이미지가 강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진달까? 많은 선배들이 해줬던 말이다. 아마 후배가 자기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게 그 당시 선배들 입장에선 자기들을 싫어한다라는 의미를 좀 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 다른 팀 선배가 끝나고 참치회에 소주 한잔 하자고 했는데(회사에서 나는 2차 안 가기로 유명했다) 마침 참치회가 당겼던 터라 "좋아요"라고 했더니 선배가 엄청 감동받은 황당한 일이 있었다. 그 선배 말에 따르면 당연히 내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좋다고 해서 놀랐다고 한다. 술도 별로 안 좋아하고 늘 2차는 패스했었던 터라 그냥 술 한잔 같이 한다는 그것 자체만으로 누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니 사뭇 놀랄 일이었다. 그렇듯 나는 사람들에게 친근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름 친했던 대리님이 술자리에서 "진짜 너 욕한 바가지 해주고 싶은데 네가 회사에 찌를까 봐 못하겠다"라고 웃으면서 말하길래 "네, 하지 마세요. 전 진짜 찔러요 하하"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나라는 인물이 꽤나 4차원이나 사회부적응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거니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성실히 일하고,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해봤기 때문에 그게 정답이 아니구나를 뼈저리게 느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순종적이고 성실한 사람을 좋아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 편하니까 처음에 좋은 거지 시간이 지나면 그냥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차라리 내 캐릭터를 명확하게 해서 내 영역을 침범하지 않게 포지셔닝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 그럼 그들도 어느 순간 거기에 적응한다. 다만, 서로 유대관계 형성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왕따 되기 십상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4차원이 아닌 고차원이라고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