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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회사에서나 선배지

내가 경멸하는 뱀의 인간

by 준비

"준비씨(가명)~어우 미안해요! 내가 깜빡했네~ 얼른 퇴근해요 얼른"


야간 근무가 끝나고 매일 아침 내가 들었던 말이다.

지금 들어도 어찌나 소름이 끼치는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말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GS리테일이라는 곳인데, 신입 시절엔 GS25 편의점 직영점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첫 발령은 월드컵 경기장에 있는 매장인데, 공연이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엄청난 물량의 상품을 나르고 진열하고 정리하느라 육체적 노동 강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직원들끼리 사이가 좋아서 힘들지만 굉장히 즐겁게 일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얼마 안 있어 세브란스 병원 내에 있는 매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곳은 CU,7-11 모두 합쳐 매출 1위인 상징적인 곳이다. 편의점이지만 슈퍼마켓 수준으로 물건이 팔리고, 나 포함 직원 6명이 근무하는 대규모 점포이자, 군대문화로 힘들다고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그 뱀 같은 선배가 있는 곳이다.


첫 만남부터 자기가 인정을 받아서 동기들 제치고 이 매장 점장으로 왔다느니, 정말 관심도 없는 얘기를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아~얘랑 나랑은 정말 안 맞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낯을 좀 가리는 편이고,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엔 굉장히 활발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과 있을 땐 굉장히 내성적인 편이다. 먹잇감이 되기 딱 좋은 성향이라고나 할까? 만만해 보여서였나? 유독 나한테 쉽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근데 재수 없는 건 그렇게 실컷 화풀이를 해놓고 조금 지나면 굉장히 상냥한 말투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한다. 이 부분이 내가 정말 역겹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저번에 이야기한 내 진급을 물 먹인 팀장? 분명 잘못된 행동이고 화가 났지만 그 사람을 미워하진 않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을 지금까지 미워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아닐까? 근데 이놈은 다르다. 그냥 내 기준 가장 경멸하는 인간 부류 중 하나여서인지 시간이 지났지만 용서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이 사그라 들었던 적이 없다. 물론 이렇게 싫어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통상 돌아가면서 야간 근무에 투입이 되는데, 점장을 제외하고 5명이니까 6일씩 하면 딱 맞는다. 근데 신기하게도 근무표가 나오면 내가 15일에서 20일 정도를 야간 근무에 배정되어 있다. 거의 몰빵 수준이다. 그리고 휴무날도 야간 근무를 선 다음날로 되어있다. 그리고 휴무일 다음 출근은 오전 타임. 그러니까 야간 근무를 서고 퇴근해서 자고 일어나면 저녁인데, 다음날 아침이 출근날인 정말 뭣 같은 근무표랄까. 어지간히도 내가 싫었나 본데 그런 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싫어할 나도 아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 8시쯤 출근하면 인수인계하고 퇴근을 하면 되는데, 이놈의 점장은 가라는 말을 안 한다.

그리고 되게 스윗한 말투로 나에게 말한다.

"준비씨~매장 잠깐만 좀 봐줘요~♡"

그리고 평균 11시까지 나는 퇴근을 하지 못하고 매장 관리를 하고, 알바생들은 "형(오빠)~왜 퇴근 안 해요?"라고 묻는다. 11시쯤 되면 굉장히 다급하고 놀란 표정으로 백룸에서 뛰쳐나와서 "준비씨! 미안해요! 내가 깜빡했어요. 얼른 퇴근해요 얼른. 수고했어요"라고 대사를 내뱉으면서 송강호 뺨치는 연기력을 선보인다. 그 가식적인 표정이 어찌나 역겨웠던지, 그에게는 내가 그렇게 해도 될 대상으로 여겨졌나싶다. 어느 날엔 야간 알바생이 점장한테 가서 "아니, 형 너무한 거 아니에요? 왜 퇴근을 안 시켜요!"라고 말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냥 불쌍한


그렇게 매일 아침 퇴근하면서 집 근처에 있는 방앗간에 들러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한 줄씩 사 먹었는데, 그게 어찌나 맛있었던지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날 위로해 주는 건 가래떡 너뿐인가 하노라...


꼬투리는 잡고 싶은데 딱히 잡을 것은 없고, 정말 하다 하다 어이없는 걸로 혼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점장이 여자친구한테 선물 받았다고 요리조리 흔들면서 "너무 귀엽지 않아요?" 했던 스파이더맨 손목 쿠션이 있었다. 닳는 게 아까웠는지 사용감이 별로였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몇 번 써보고 어느 순간 그냥 모니터 옆에 비치해 둔 말랑말랑 손목 쿠션이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인수인계를 해주는데 그냥 그대로 보내주긴 아쉬웠는지 꼬투리 잡을게 뭐 있나 한참을 살피더니 갑자기 그 스파이더맨을 들면서,

"아니 청소 안 해요? 여기 먼지 쌓은 거 안 보여요? 앞으로는 이것도 닦도록 해요. 알았어요?

"..."

살다 살다 손목쿠션 안 닦았다고 혼날 줄이야.

그 실리콘 덩어리를 내 눈앞에서 흔들면서 소리 지르는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젖은 걸레로 소중하게 스파이더맨을 닦아주었다. 커피라도 타오라고 시켰으면 침이라도 뱉었을 텐데, 젖은 걸레로 그냥 만족했다.


세브란스 매장에서 근무한 건 2-3개월 정도이고, 나는 굉장히 이례적으로 점포 생활을 1년도 하지 않은 채 다른 부서로 가게 되었다. 통상 6개월에서 1년간 점포에서 근무하고, 점장을 달고 근무를 하다가 이제 가맹점 영업관리직으로 가는 게 일반적인 루트인데, 점포생활을 6개월 정도만 하고 영업이 아닌 다른 부서로 가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전례에 없던 일이기도 했고 나에게는 정말 럭키 한 상황이었다. 다만 근무지가 서울이 아닌 대전이었다는 게 아쉬운 점이지만, 나는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물론 말이 발령이지 그 점장도 나를 보내고 싶어서 추천한 거다. 점장과 사이가 좋았다면 그 기회를 잡지 못했을 텐데, 다행히 점장이 나를 죽도록 싫어하는 덕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사람 일은 정말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다.


그 점장은 내가 왜 그렇게 싫었을까?

나는 튀는 행동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반항을 하는 편도 아니고, 그냥 좀 소극적이고 조용히 있었던 것뿐인데. 그래, 그냥 만만하게 보였던 거고 한 번 질러봤을 때 아무런 저항도 없으니 샌드백 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26살의 내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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