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팀장님 지금 저 B 주신거에요? 그럼 제가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죠"
"야야 내 얘기 들어봐...네가 아직 어리고, 한 번씩 진급 누락하는게 오히려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는거야"
"제 인생 계획을 왜 팀장님이 결정하시나요? 진급을 누락해서 오래다니건 진급하고 짧게 다니건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 같은데요?"
거의 1시간이 넘도록 핏대를 세우고 팀장님을 몰아 부쳤고, 팀장님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했다. "저 퇴사할게요. 아! 근데 저 그냥은 안나가는거 아시죠?" 화가 머리 끝까지 나고 이 어이없는 상황을 1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 자리에서 퇴사 선언을 했다. 그게 나였다. 부당함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 그래서 아버지 마지막 유언이 유도리 있게 살아라였는지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6살에 대기업을 들어가 30대를 회사에서 맞이하게 된 그 해가 내가 대리 진급을 앞두고 있던 때이다. 그 당시 회사 상황을 보자면, 진급에 미끄러진 사람들이 꽤 있다보니 한 번에 대리 진급을 하는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리진급은 그냥 되야 하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실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대다수의 동기들도 진급을 기대하면서도 한 번 정도 미끄러지는건 어느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고, 나 또한 그러했다. 그런데 정말 하늘이 도왔는지 우리 팀에 진급 대상자가 딱 나 1명이었다. 통상 진급 대상자가 실적 때문에 미끄러지는 경우는 많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실적은 A를 받게끔 팀 내에서도 밀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급의 핵심은 MBO등급이 아니라 팀장 평가이다. 근데 팀 내에 진급 대상자가 여러명이면, 또는 팀 내에 진급 누락자가 있으면 두 번 떨어지게 할 수 없으니 밀어주는게 인지상정이랄까. 즉, 진급은 실적도 중요하겠지만 운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그 운을 아주 몰아서 받은 격이었다. 진급 대상자가 오직 나 혼자였기 때문에 팀장님이 S 또는 A 등급을 부담없이 줄 수 있고, 이미 MBO 평가에서 A등급을 받아놨기 떄문에 99.9% 진급 확정이었다. 다른 동기들이 진급 때문에 전전긍긍 할 떄 나는 이미 마음의 평화와 내년에 대리를 달고 연봉이 얼마나 오르는지, 실수령액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등을 상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란건 참 신기하다. 99.9% 확률을 0.1%의 확률이 뒤집어 버리니 말이다.
진급에서 떨어진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했다. INFP에게(지금은 INTP) 그런 상황은 그냥 끙끙 앓으면서 받아들여야 하는게 맞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나고 연봉협상 기간에 팀장님과 1:1로 면담을 했다. 뭐 연봉협상이란게 말이 협상이지 연봉통보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이런저런 내용이 가득한 서류들을 영혼없이 넘기면서 가만히 팀장님 말을 듣던 순간, 팀장님이 어느 한 페이지를 어영부영 넘기는게 내 눈에 들어왔다
"팀장님 잠깐만요!"
팀장님이 넘긴 페이지를 다시 앞으로 넘기고 보니, 거기엔 팀장님이 나를 평가한 등급이 기재되어 있었다.
"B요??????"
"팀장님 지금 저 B 주신 거에요?"
이게 전쟁의 서막이자, 인프피를 파이터로 흑화시킨 트리거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 않은가. 자기 팀 내 진급 대상자가 1명이고 그 진급 대상자 실적이 A가 나온 상황이면 통상 A 또는 S를 준다는건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B라니?? 그럼 대체 누굴 A를 준거지? 그리고 나를 이렇게 엿먹인 이유가 뭐지?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감과 동시에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예상외의 공격적인 모습에 팀장님이 좀 당황했고, 나를 타이르기 위해 한 번 쯤 진급 누락하는게 나쁘지 않다는둥, 내가 나이가 어려서 배울게 더 많다는 둥 X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제가 나이가 어려서 배울게 많은데 저는 왜 제 업무를 도움없이 저 혼자 하고 있고 거기서 A를 받은거죠?"
팀장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진급에 떨어질 수 없는 결정적 이유를 말했다. 그 당시 MBO항목중에 <창의혁신> 이라는 새로운 항목이 중간에 추가되면서 전직원이 아이디어를 뽑아내는데 미쳐있던 시기가 있었다. 어떻게든 아이디어가 통과되어서 적어도 B이상은 받으려고 수십개의 아이디어를 일단 쏟아냈지만 대부분은 C등급을 받았고, 우리팀 역시 나를 제외한 모두가 C를 받았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갑자기 추가된 항목에 대한 불만들이 쏟아져나왔고, 회사에서는 갑작스럽게 추가된 부분을 반영하여 "올해에 한해, 가장 높은 등급을 받은 팀원의 등급을 모두가 똑같이 받는다" 로 절충안을 제시했다. 즉, 팀 내 영웅 1명이 모두를 먹여살리는 격이었고, 우리팀의 영웅은 나였다. 왜냐면 내가 팀 내 유일한 A 등급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차장 진급 대상자였던 팀장님도 A등급을 받으면서 진급에 성공했다. 유일한 진급대상자이면서, 팀 내 공헌도가 가장 높은 내가 진급에서 미끄러질 이유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걸 팀장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영부영 다른 핑계로 넘어가려고 했던거였고, 예상치 못한 나의 공세에 결국 이실직고를 하게 되었다.
"xx이가 이번에도 미끄러지면 두 번째인데 그건 막아야 되지 않겠냐. 니가 이해 좀 해라"
어.이.가.없.었다.
왜냐하면 xx이는 다른 팀 선배이자, 우리 팀장님이 우리 팀에 발령 받기 전에 데리고 있던 팀원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금 자기가 맡고 있는 팀원은 내팽개치고 전에 데리고 있던 팀원을 진급시키려고 일부러 나한테 B를 준거다. 그 선배는 MBO 실적이 A가 나오지 않아서 그 팀에서 밀어줘도 나랑 붙으면 밀리기 때문에 그 선배팀에선 그 선배를 A로 밀어주고, 우리팀에선 나를 B로 다운시켜서 점수를 역전시킨 것이다. 진급 평가에선 팀장 평가 비중이 60%로 더 높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진실을 알게 되고 나는 더욱더 폭주해서 욕을 제외한 모든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쏟아내고 쏟아내도 화는 풀리지 않았고 그런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팀장님은 제안을 했다
"내년엔 무조건 진급 시켜줄테니까 1년만 참고 열심히 일 해보자"
회의실에 개 한 마리가 들어와서 짖나 싶었다.
"팀장님, 어차피 제가 내년에 무조건 진급하는거면 제가 굳이 열심히 일 할 이유가 있나요?"
"응?"
"아니 무조건 진급 시켜주신다면서요. 근데 왜 제가 굳이 열심히 일해요. 무조건 시켜주실건데..."
그리고 내가 팀장님께 역으로 제안을 했다
"오케이. 그럼 이건 제가 그냥 넘어갈테니까 대리 진급하면 받을 연봉 차액분 1년치 팀장님이 보상해 주세요"
팀장님은 말이 없었다.
"그건 또 싫으신가보네요?"
...
"저 회사 나갈게요. 근데 그냥은 안나가는거 아시죠? 대기업 인사시스템이 이렇게 허술한지 저는 도무지 이해도 안되서 사장에게 말한다에 해당내용 고발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회의장 문을 박차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선배들이 무슨일이냐고 물어서 있는 그대로 다 말해줬더니 다들 놀라는 눈치였고, 한 대리님이 "야, 진급 대상자인 니가 B인데 왜 나는 C냐? A 받은 사람이 있어???"
팀장 평가는 전체를 B를 줄 수 있지만 누구 하나 A를 주면 누구 하나는 C를 줘야하고, 누구 하나 S를 주면 누구 하나 D를 줘야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진급 대상자인 내가 B를 받았다는건 나머지 팀원들이 다 B를 받았다는건데 그 대리님은 C를 받았다. 진급 대상자를 제끼고 A를 받은 사람이 누굴까...? 한 대리님이 말없이 앉아 있었고, 우리는 모두 그 대리님이 A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하나 더 나오는데, 그 대리님은 xx선배가 있던 팀에서 우리 팀으로 올해 발령받아 넘어온 분이다. 즉 우리 팀장님이 이전에 데리고 있던 팀원이란 말이다. 통상 타 팀에서 중간에 다른 팀으로 오는 경우는 실적을 거의 포기하고 오는것이다. 기존에 있던 식구를 제끼고 새로 온 사람을 챙겨주는 팀장은 없기 떄문이고 그걸 감안하고 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팀장님은 현재 자기가 데리고 있는 팀원들을 철저하게 버리고 이전에 데리고 있었던 팀원 2명을, 우리 희생을 발판으로 끌어올려 준 것이다.
퇴사 선언을 한 후, 내 후임을 찾기 위해 다른 부서에서 인력 충원을 요청한 상황이었고 한 두달이 지나서야 후배 한명이 왔다. 팀장님은 세세하게 인수인계를 해주길 바랬고, 나도 아주 자세히, 꼼꼼하게 7개월간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인수인계를 7개월 했다라는건 사실 말이 안되는 긴 기간이다. 그러니까 팀장님은 내가 홧김에 퇴사한다고 말했다고 생각한거고, 그냥 팀원을 한 명 더 보충한 것이다. 이 기간동안 정말 나는 아무런 부담없이 회사를 놀이터 다니듯 편하게 다녔고, 10월말이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말을 했다
"저 이제 나가겠습니다"
팀장님 포함 팀원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다.
"너..진짜 나가게?"
"네! 나간다고 했잖아요. 그럼 나가야죠"
쿨병 돋은게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이 뜬 상태였고, 그런 부당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큰 그릇이 아니었다. 이미 7개월이 지나서는 미운 마음도 사그러들고 그냥 해탈한 상태였다.
"대기업? 그까짓게 뭔데 내가 그런 대우를 받고도 참고 다녀야돼?"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은 없고 단 한 번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퇴사를 후회했던 적은 없다. 2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큰 조직에서 일을 해 본 경험,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누군가 내 인생이라는 소중한 공간에 거리낌없이 들어와서 헤집어 놓고 "니가 이해해" 라고 말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달까. 대기업이란게 그런걸 참으면서까지 있어야 할 대단한건가?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렇게 참고 참다보면 행복해지는건가?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NO" 였을뿐이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를 박차고 나왔고, 경제적 압박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얕잡아 보는 시선들은 그 여파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11년이란 시간을 죽지도 않고 버티는 것 보면 나는 나름대로 생존력이 좀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런데 내 인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의 7할은 이 11년에서 만들어지고 있고, 그 덕에 이렇게 에피소드 부자가 되었다. 카페 알바를 시작으로 동대문 도매시장, 콜센터, 과외,대행알바,배우,모델,취업컨설팅 등등 각기 다른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이 과정에서 변화된 인생관과 삶을 대하는 자세, 자존감 지키는 방법, 위기 속에서 멘탈을 유지하는 방법 등등의 이야기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블로그를 하고, 유튜브를 하고, 이렇게 글을 써보는 것 또한 나의 도전이자 일상이 되었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은 늘 설레고, 일상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나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