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를 이겨버린 0.1%
20대 중반의 이른 나이에 발을 디딘 대기업
어린 나이에 큰 기업에서 근무를 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나이에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나는 서른이 되었고, 이제 대리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기업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진급이 정체되어 있는 상태여서 사원에서 대리로 진급하는 것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진급에 누락된 선배가 있으면 이제 갓 진급 대상자에 오른 사원은 그다음 해를 기약해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진급률은 50~60% 정도에 그쳤기에 10명 중 4~5명은 진급 누락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내 인생에 그렇게 많지 않은 운이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던 것일까.
나는 100% 진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적도 우수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팀 내 진급자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런 상황을 만나는 것은 정말 찾기 힘들 정도이다. 그래서 이미 주변 선배들 및 동기들이 미리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미 실적은 A등급을 받았으니 팀장님만 나에게 A 또는 S등급을 준다면 자연스럽게 진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팀 내 선배 중 진급대상자 혹은 누락자가 있었다면 나는 다음 해를 기약해야 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팀장이 줄 수 있는 A등급 혹은 S등급은 팀 내 1명뿐이었기 때문이다. B등급을 받고 진급한다는 불가능하다. MBO실적보다 팀장 평가가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실적, 그리고 유일한 팀 내 진급자라는 이 두 가지 필수요소를 갖춘 나는 진급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연봉 천만 원 정도가 오르니 생활에도 훨씬 더 여유가 생길 것이고, 일찍 시작한 회사생활이니만큼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미래에 어떻게 내 집 장만을 할지 등등 온갖 긍정적인 상상들을 했다. 그래서인지 진급을 앞두고 그렇게 회사를 다니는 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30대의 시작을 아주 기분 좋게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혹시 모를 여러 변수들을 생각해 봤지만 완벽한 필수 조건 두 가지를 갖춘 지금 나는 100%라고 확신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와 같은 시기에 우리 팀장님도 과장에서 차장으로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장이 되는 실적의 한 부분을 내가 해결해 주었다. 2/4분기 즈음에 갑자기 새로운 MBO항목이 추가되었고, 그 항목으로 전사 직원들이 멘붕에 빠졌던 적이 있다. 각 파트별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그 아이디어를 그룹 차원에서 검토해서 등급을 매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디어 개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미친 듯이 아이디어를 뽑아내고 제출했지만 대부분이 C등급에 그쳤고 B등급을 받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소수가 A등급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변화로 내부 불만이 터져 나오자 인사팀에서는 갑자기 추가된 항목이니만큼 팀 내 가장 우수한 등급을 받은 사람의 등급을 팀원 전부가 공통으로 받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 해에 한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딱 한 개의 아이디어를 제출했고 그 아이디어가 A등급을 받았다. S등급 여부도 검토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단계에서 내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의 수익 창출이 가능한지 그룹차원에서도 확신할 수 없기에 A등급으로 책정했다고 했다.
평소 아이디어 내는 것을 좋아했던 나에게 그리 어렵지 않고 즐거운 일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고 성과로 이어지니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고, 그게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이렇듯 내 덕분에 우리 팀원 모두는 그 항목에서 A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차장 진급을 앞둔 팀장님도 만약 내가 A등급을 받지 않았다면 실적에서 큰 낭패를 봤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팀 내 기여도로 치자면 단연코 내가 1등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수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생은 참 재미있는 것이었다.
내가 예상치 못한 1%의 숨겨진 변수가 현실이 되어 100%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급에서 떨어졌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고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도대체 어떤 부분 때문에 진급에서 떨어진 거지? A등급으로도 진급을 못할 정도면 다른 경쟁자들은 S등급을 받았다는 것인가? 10%를 뽑는 것도 아니고 고작 50% 확률에 A등급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밀은 연봉협상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말이 연봉협상이지 사실상 형식적으로 하는 연봉 통보자리이다.
팀장님은 서류들을 보여주면서 나의 실적과 여러 부분들에 대한 것들을 짚어주고 계셨고 나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팀장님이 서류 한 장을 급하게 넘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나는 그 서류를 다시 뒤로 넘기면서 그 서류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그곳엔 팀장님이 나에게 준 평가 등급이 기재되어 있었다
"B"
황당함과 화나는 감정이 동시에 순식간에 몰아쳤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개이자 결과였기 때문이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나는 그 순간부터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따지듯 팀장님께 물었다.
"팀장님 저 B 주셨어요?"
이미 팀장님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고, 흥분해서 날뛰고 있는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진정될 리가 없었다.
"아니 네가 아직 나이도 어리기도 하고, 회사생활이라는 게 한 번씩 진급에 미끄러져야 오히려 정년도 늘어나서 오래 다닐 수 있어. 진급 빨리한다고 좋은 게 아니야"
내가 살면서 들은 개소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법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내 나이가 어리고, 내가 회사를 오래오래 다닐 수 있도록 친히 진급을 누락시켜서 배려해 주었다는 이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제 인생 계획을 왜 팀장님이 세워주세요? 그거 저랑 상의하셨어요? 제가 회사를 오래 다니건 짧게 다니건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젠데 왜 팀장님이 제 인생에 개입하시는 거죠?"
"..." 팀장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좋습니다. 어쨌건 그런 이유로 진급 누락시키신 거니까 해당 내용 인사팀과 조직문화팀에 제보해서 정당한 결정인 건지 확인해 볼게요"
이 말을 내뱉자마자 팀장님은 당황하며 진짜 이유를 말해주었다.
두 번째 뚜껑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우리 팀은 이전에 대전 지역과 통합되어 관리됐었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분리되었고, 그러면서 광주/전남 지역에 새로운 팀장님이 오시게 된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 팀장님은 개발팀 팀장으로 계시다가 오신 분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팀으로 오기 전 그 팀에 있던 선배 한 명이 이미 한 번 진급 누락을 했는데 올해 실적이 엉망으로 나온 상황이었다. 즉 나랑 붙으면 무조건 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팀장님은 그 선배를 진급시켜야 해서 나를 B등급을 주면서 점수를 역전시킨 것이었다. 결국 팀장이란 사람이 현재 자기가 데리고 있는 팀원을 버리고 이전 팀원을 챙겨준 상황이었다. 아니, 챙겨준 것도 아니고 비정상적인 월권행위로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말을 전해 듣는데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더 웃긴 건, 진급 대상자인 내가 B를 받았는데 A를 받은 팀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팀원은 그 팀장님과 같은 팀에 있던 대리님인데 5월경에 우리 팀으로 부서 이동을 하신 분이었다. 회사를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중간에 부서를 이동한 사람은 실적을 포기하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타 팀에서 넘어온 사람을 기존에 있던 팀원들을 제치고 더 좋은 평가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고, 본인들도 그것을 각오하고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진급년차나 그 이전 해엔 옮기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 대리님도 그 팀에서 대리 진급을 하고, 넘어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 대단하신 팀장님은 자기가 데리고 있던 팀원 두 명을 모두 제대로 밀어주신 휴머니스트였던 것이다.
"대기업 인사시스템이라는 게 참 허술하네요. 전 회사 그만 다니겠습니다. 그리고 팀장님 제 성격 아시겠지만 저 그냥 안 나가는 거 아시죠? 이 부분 직접 대표님께 메일이라도 써서 확인받고 나갈 겁니다."
팀장이라지만 이미 선을 넘어버린 순간 나에겐 굳이 존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다.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내 의견을 조목조목 전달했고, 회의실에서 1시간가량을 싸워가는 통에 팀원들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의 이런 반응은 팀장님도 예상을 못했는지 계속해서 허둥대며 나를 달래기에 급급했지만 이게 달래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어차피 전 돈이 목적이니까, 진급해서 상승될 연봉 팀장님이 메꿔주세요. 그럼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당연히 들어주지 못할 거란 걸 알았지만, 만약에 팀장님이 천만 원을 현금으로 준다면 그냥 넘어갈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팀장님은 헛기침을 하며 내년에 꼭 진급시켜 줄 테니 올해만 참고 열심히 다녀보자라는 교과서적인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근데 제가 왜 열심히 해야 하나요? 어차피 진급시켜주신다면서요. 그럼 열심히 할 필요가 없죠. 어차피 될 진급인데 뭐 하러 열심히 해야 합니까?"
더 이상 대화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팀 내 선배 중 한 명이 자기 실적이 아닌 것을 자기 실적으로 넣은 것을 알고 있었는데 팀장님도 그거 알고 계셨냐고 물었다. 분명 몰랐을 리 없을 팀장님이지만 모르쇠로 일관하기에 못을 박아버렸다.
"아 그러세요? 근데 지금 제가 말씀드렸으니 아셨네요? 전 전달드렸으니 팀장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나는 옅은 미소를 띠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싸움은 결국 명분이고 나는 두 가지 명분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나는 진급 비리와 관련된 내용, 그리고 하나는 팀원 부정행위에 관한 제보. 그리고 팀장님이 그걸 알고 있었건 모르고 있었건 내가 말을 던진 순간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상부에 제보해서 감사를 진행하건, 그래도 덮어두건 말이다. 전자는 일이 커지고 후자는 나에게 목줄이 쥐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팀장님도 이번에 진급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문제를 키우면 팀장님 진급 문제, 아니 그 이상의 문제에 놓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폭풍은 지나갔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아마 대부분은 이런 일이 있어도 참고 다음 해 진급을 기다리며 다니겠지만, 나는 돈보다는 내 가치관이 훨씬 중요한 사람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뭔가를 계속 배우고 느껴야 만족을 하는 타입이라 이미 열심히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순간 이 회사에 계속 있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퇴사 통보는 홧김에 한 말이 아니다. 그 순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의사결정 과정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팀장님은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기에 다시 한번 명확히 의사를 전달했다.
"저 퇴사할 거니까 후임 뽑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