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모두 추억으로...
퇴사 선언 후 나처럼 회사를 오래 다녔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단, 갑작스러운 퇴사였기에 진짜로 나가는 건지 그냥 한 번 던져본 건지 팀장님도 반신반의했던 것 같다. 그리고 후임을 뽑아야 하는데 당시 영업팀에서도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어 자기 팀원을 빼서 주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팀장님은 일을 잘하는 사람을 데려오고 싶지만, 일 잘하는 사람을 내주는 팀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후임을 구하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결국 팀장님이 썩 마음에 들어 할 후임으로 받지 못했다. 이제 입사한 지 2년 정도 된 후배를 받았는데, 아무래도 영업팀에서 입지가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과거의 나와 같달까. 그래서 인수인계만큼은 제대로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사수가 나를 보호해 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면 안 되니까 말이다.
후임을 받긴 했지만 팀장님은 내심 내가 계속 다닐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싶었다. 왜냐하면 8개월가량을 더 다닌 상태였고, 언제 나갈 거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회사생활이라는 게 이렇게 편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걸 내려놓고 다녔다. 아무런 눈치도, 굳이 실적을 챙기지도 않았다. 옆에 후배를 앉혀두고 하나씩 일을 알려주고, 데리고 다니면서 사업설명회는 어떻게 하는지, 상담은 어떻게 하는지 등을 보여주면서 8개월간 인수인계를 해줬기 때문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약속했던 10월이 다가왔다.
"저 이제 퇴사하려고요"
마치 나의 퇴사를 잊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토끼눈을 하며 옆자리에 앉은 대리님은 "너 진짜 나가게?"라고 물었다. 나는 "나가기로 했으니 나가야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송별회 날짜가 잡혔고, 뭔가 기분이 묘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나가는 것이니, 퇴사 후에 뭘 할지 걱정도 들었지만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이 훨씬 컸다. 새로운 시작은 항상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것이지만 그때만큼은 설레는 감정이 훨씬 컸다.
퇴사 소식을 들은 동기들도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고, 그동안 감사했던 분들을 찾아뵙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동안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같이 일했던 유관부서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반납하고 회사를 떠났다. 아들이 대기업에 다니는 것이 어머니에겐 하나의 자랑거리였는데, 어머니는 나의 퇴사 결정에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으셨다.
"네 인생 네가 사는 거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어머니가 항상 하시던 말씀인데, 나는 늘 내 의견을 믿고 지지해 주는 그런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일단 뭘 해야 할지 정한 건 없지만 서울로 가기로 했다. 어머니와 형을 두고 다시 서울로 가려고 하니 내심 맘이 편치는 않았다. 20년이 넘게 한 번도 수리하지 않은 오래된 아파트,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여러 경제적 악재들이 겹친 상태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좀 더 새로운 기분으로 어머니가 새 인생을 사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퇴직금과 모아둔 돈 일부를 보태서 집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뭐랄까. 새 출발을 하면서 내 수중에 돈이 있으면 뭔가 낭만이 없다는 기이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나는 (MBTI) S가 아닌 N이다. 새시, 장판, 도배까지 싹 다 뜯어고치고 집에 있는 모든 가전제품과 가구를 바꿨다. 새 침대, 새 옷장, 새 냉장고 등등 갖고 있는 대부분의 돈을 썼지만 서른 살에 어머니께 그런 선물을 해드릴 수 있음에 스스로 뿌듯했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700만 원을 들고 서울로 향했다.
마침 이태원에 사는 음악 하는 동생이 호주로 워홀을 떠난다고 해서 내가 대신 월세를 내고 6개월간 거주하기로 했다. 서른한 살 백수가 새롭게 사회에 발을 내딛는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벌써 12년이 지났다.
죽을 만큼 힘든 순간도 있었고,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퇴사를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때 퇴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수많은 경험들을 해보지 못했을 테니까.
아직도 나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미완성이자, 억센 뿌리처럼 내 삶을 붙잡고 조금씩 개척해 나가고 있다.
흰머리가 나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아 진 40대가 되었지만, 고여있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실패해 보는 나의 삶을 사랑한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며... GOOD B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