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사회
"제가 선배지만 전 2급이라 결국 몇 년 있으면 준비씨가 먼저 대리 달 거예요"
선배는 애써 밝게 웃으며 말해보려 했지만 깊은 한숨과 뒤섞여 내뱉어진 이 말이 편하게 들릴리는 없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대졸공채와 전졸공채가 나뉘어 1급 사원과 2급 사원으로 분류되었다. 전졸 공채지만 대졸 지원자도 있었기에 2급 사원이라고 다 전문대 졸업은 아니었다. 선배가 저 말을 내게 한 이유는 지금은 선배지만 결국 자기 후배가 훨씬 먼저 대리를 달기 때문에 몇 년 후에는 대리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현실이 꽤나 잔혹하다고 느껴서일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확실히 선배로써의 입지를 다지기에는 뭔가 부족한 명분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사실 나는 남 일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갖는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냥 선배면 선배지 굳이 1급 선배와 2급 선배를 나눠서 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동기들도 다 나처럼 생각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언젠가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동기 몇몇의 대답을 듣고 그 선배가 왜 그런 말을 했고, 그런 표정이었는지 이해되었다.
"야~사실 그렇잖아. 몇 년 있으면 우리가 데리고 저 선배는 1급 사원이야. 솔직히 선배라고 하기 애매하지"
다들 겉으로 하하 호호 웃으며 잘 지내고 있었는데 속으로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물론 우리가 진급은 빠르겠지만 그냥 선배니까 계속 선배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마치 승은을 입은 궁녀가 후궁이 되어 친했던 궁녀들과는 다른 계급에 위치한 그런 모습으로 연상되었다. 그래서 그 선배가 나에게,
"그래도 준비씨는 그런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서 전 준비씨가 좋아요"
라고 했나 보다. 학군단 생활을 했던 터라 수직적인 문화에 익숙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수직적인 관계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던 나였기에 이게 논란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좀 유치하게 느껴졌다. 비단 회사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급을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대기업을 다녔을 때와 퇴사 후알바를 했을 때 사람들이 대하는 것이 묘하게 다르다는 건 수도 없이 경험했던 부분이다.
나의 행복과 자존감이 타인에 의해 정해질 수 있나? 저 사람이 나보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간혹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상대방의 학벌이나 수입 등을 거론하며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들을 하곤 한다. 쟁점사항과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을 들먹이며 조롱하듯 자신의 능력이나 가진 것을 뽐내는 행위야말로 인간으로서 사고하는 기능이 마비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임을 모르나 보다.
어찌 되었건 1급과 2급이 나뉘어 있다면 담당하는 업무도 각각의 연봉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일을 하지만 그냥 등급과 연봉만 다를 뿐이었다. 내가 퇴사 후 동기에게 듣은 바로는 그 부분이 문제가 되어 개선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회사에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알면서도 그냥 방치하고 있다가 누군가 불만 글을 올리니 그제야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은 것이겠지.
근데 이 부분은 회사의 관점보다 사람대 사람으로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계급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계급을 나눔으로써 내가 더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결국 나보다 더 계급이 높은 사람한테 나는 인간대 인간으로서가 아닌 갑과 을로써 존재하겠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얼마나 우매한 생각인지 따져볼 필요도 없다. 그냥 사람대 사람으로 대해주면 안 되나?
왠지 모르게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도 그때의 선배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