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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계약인가? 언약인가?

부제: 사랑과 헌신의 본질을 돌아보며

by 전준수

최근 이탈리아에서 근무할 때 알고 지낸 한 분을 만났다. 그와의 대화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결혼식 전에 커플이 변호사 앞에서 재산 관련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이 계약서는 이혼 시 재산을 분할하는 방식에 대해 미리 합의하는 문서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재산을 5:5로 나누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 전부터 각자 재산을 관리하며 공동 비용만 각출하는 방식이다. 여전히 5:5로 나누는 쪽이 많지만, 점점 후자의 방식을 택하는 커플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결혼 대신 파트너 관계를 선택하는 이유

7년 전 내가 이탈리아 법인장으로 근무할 때, 결혼하지 않고 파트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당시 최고 디자이너였던 동료는 50세에 결혼을 발표했는데, 알고 보니 파트너 사이에서 낳은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있었다. 결혼식은 이제 막 올리지만, 가족으로 살아온 시간은 10년이 넘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탈리아에서 파트너 관계는 동등한 관계로 여겨진다. 결혼 대신 파트너로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양가 가족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관계에서는 오랫동안 부부처럼 살아도 상대방의 부모나 형제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법적 부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반영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책임을 지거나 어려운 상황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사랑은 어려움 속에서 더 빛을 발하고, 헌신이 관계를 더 깊게 만든다. 하지만 처음부터 헌신과 책임을 차단하는 관계는 겉보기에는 편할 수 있지만, 삶에서 더 큰 기쁨과 깊이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사랑과 헌신의 의미

결혼 서류에 서명하기 전에 재산 분할 계약서를 작성하면 유사시에 분쟁을 줄일 수 있다는 실용적인 장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서는 처음부터 관계를 "끝날 경우"를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느낌을 준다.

사랑에는 로맨스를 넘어 의지적 결단과 수고가 필요하다. 관계가 어려울 때 헌신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사랑의 힘인데, 시작부터 이를 배제하는 접근 방식이 진정한 사랑의 깊이와 기쁨을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89세 목사님의 이야기

며칠 전, 한 은퇴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올해 89세이신 그분은 최근 병원에서 죽음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졌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어디에서도 손을 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기적처럼 회복되셨고, 현재는 정상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계신다.
목사님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아내가 “당신 먼저 가면 어떻게 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목사님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지난 세월 동안 말로 상처를 준 모든 일에 대해 사과했다고 했다.

그 순간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관계를 다시 세우는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지금 건강을 되찾아 행복한 모습으로 설교를 전하는 노 목사님의 얼굴에서 사랑과 헌신이 주는 깊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마무리하며: 사랑에는 수고가 필요하다

단순히 편리함만을 추구해서 더 좋은 관계로 나아가기 어렵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책임과 헌신이 더해질 때 관계는 깊어지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기쁨을 얻었던 것 같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는 과정이다. 그런 노력이 쌓일 때 사랑은 빛나고, 나 자신도 성장하게 되는 게 아닐까?


적용 질문

1.내게 있어 결혼은 계약인가, 언약인가?

2. 나는 내 관계에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헌신과 노력을 하는가?

3.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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