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억은 즉석에서, 1억은 멈춰서
리더의 의사결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빠른 결정이 좋은 결정이라는 말도 있고, 중요한 일일수록 신중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오래전, 그룹 전략부문장으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창업자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의사결정 방식이었다.
가령 이런 장면이다.
500억 규모의 결정을 그 자리에서 비교적 담담하게 내린다.
반면 1억짜리 결정 앞에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느 날은 한 경영자가 500억에 가까운 손실을 냈는데도 “그럴 수도 있다”며 오히려 격려했다. 반대로 1억 규모의 판단을 잘못한 경영자는 상당히 크게 질책받는 장면도 있었다.
방 밖에 있던 나에게도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의사결정을 신중하게 하느냐, 빠르게 하느냐는 금액의 크기 문제도, 시간의 여유 문제도 아니었다. 그 결정에 대해 얼마나 미리 생각해왔는가의 문제였다.
창업자는 500억 결정을 즉석에서 할 수 있었다.
그건 즉흥적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일과 관련된 정보 수집과 고민이 오래전부터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회가 왔을 때 판단할 수 있는 기준, 즉 자신만의 잣대(canon)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런 상황을 대비해 일정 수준의 여력을 확보해 두는 것 역시 내가 보아온 많은 부자들의 공통점이었다.
반대로 1억에 대해 멈춰 섰던 이유는 분명했다.
그 사안에 대해서는 기준도, 경험도, 지식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더 알아보고, 더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그리스인들이 구분했던 두 가지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크로노스의 시간,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기회가 되는 카이로스의 시간.
시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원도, 돈도, 기회도 결국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갑자기 주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은 운이 될 만한 것을 미리 바라보고, 그 방향으로 움직일 줄 아는 능력을 뜻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분명해졌다.
10년, 20년 뒤를 미리 설계하지 않으면 오늘의 결정은 늘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래가 비교적 또렷해지면, 지금 하는 일도, 시간 사용도, 공부할 것과 만날 사람, 그리고 내 안에서 샘솟는 에너지까지 달라진다.
그렇게 오늘은
미래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
아마 이것이 지금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기업처럼, 제대로 경영하고 있는가?
요즘 이 질문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