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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04화

고라니 소동

앙성 산문

by 시준


복상골에 자리 잡고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뒷산 중턱쯤에서 들리던 기괴한 소리를 듣고 나는 면소재지 경찰 지구대에 신고할 뻔했다.

악악대는 절박한 소리는 영락없이 억지로 끌려가는 여인이 저항하며 발악하는 비명이었다. 어둠이 깃든 산속에서 누군가가 괴한에 납치되어 살해 위협을 받는 것 아닌가 쭈뼛한 생각에 할 수 있는 최선이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누르자는 생각이었다.

고라니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고도 한동안 신경이 쓰였고 수년이 지나 익숙해진 지금도 고라니 우는 소리는 여전히 묘하게 기분 나쁘다.


조용하고 컴컴한 밤이었다. 뒷산 중턱이 아닌 집 앞쪽에서 짐승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숨죽이다 어쩔 수 없이 내뿜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숨소리에, 내키지 않아 하며 마당에 나가보니 대문 근처에서 소리가 난다. 손전등을 비추며 다가가도 짐승이 놀라지도 않고 그대로 누워있는데, 몸부림치다 지쳐서 자포자기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늘어져 있는 모습이 측은하고 비참했다. 플래시를 비춰보니 철창에 끼어 비벼 댄 뱃가죽이 꺼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대문 옆 철제 펜스의 철창 틈새로 빠져나가려다 머리와 앞발은 길가에 내밀고 엉덩이와 뒷다리는 담장 안쪽으로 반반씩 걸쳐 오목한 허리가 펜스 철창에 끼어 있었다. 철창에 끼어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앞발과 뒷발 부근 흙이 움푹 파였다. 꽤 큰 몸집의 고라니였다.

어떻게 머리통과 어깨를 저 좁은 틈새로 빼냈을까 의아했다. 동시에 네발짐승은 뒷걸음을 치지 못하는 걸까 궁금했다.

손전등 불빛에 비친 광경이 볼수록 난처했다. 뒷다리를 잡아당겨 몸통을 빼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뒷다리를 만지기조차 싫었다. 공사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시신을 씻겨보고 염하는 절차도 거들어 보았지만 저렇게 늘어진 짐승의 장례를 내가 치러야 하나 하는, 평온한 여름밤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는 짜증이 앞섰다.

아마도 이놈이 그동안 우리 집과 밭을 무시로 드나들며 연한 포도 나뭇잎, 고구마 순, 무 이파리까지 염치없이 싹둑 잘라 뜯어먹고 묘목밭 멀칭 비닐에 온통 구멍을 내고 잔디밭 여기저기 콩자갈 같은 꺼먼 똥을 뿌리고 다닌 놈이리라. 잡히면 고소할 줄 알았는데 막상 늘어진 몸뚱이를 보니 측은해 보이고 그런 모습이 이 여름밤에 내게 현실적인 골칫덩이 짐이 될 줄은 몰랐다.

어찌어찌 철창 사이에서 사체를 빼낸다 해도 파묻을 땅 파는 삽질도 한여름 무 더위에 족히 한나절 수고 꺼리지만 어디다 묻을 것이며, 어중간하게 묻어 놓으면 무더운 날씨에 사체로 인해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어둠 속에 고민이 되었다. 나와 저 고라니와는 법적이든 도의적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굳이 얘기하자면 농작(農作)의 가해자인 고라니와 불특정 피해자 중 하나로서의 나와의 관계뿐이었다.

문득, 이 상황이 밤중에 집 밖에서 나는 신음 소리를 들은 무고한 촌민이 전적으로 떠안아야 할 무거운 고민인지에 생각이 미쳤다.

‘나라의 주인 없는 산짐승, 들짐승의 관리는 누가 하는 것일까?’

언젠가 티브이에서 본, 동물을 구조하는 따뜻하고 믿음직한 119가 떠올랐다.


‘‘네 119 상황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어~ 이쪽으로 전화를 하는 게 맞는지 주저하면서 전화합니다아~. 고라니가 우리 집 담장 틈에 끼어 있는데요~”라고 말을 꺼내는데,

‘‘아 고라니면 119가 아니고 시청 민원실 110으로 하셔야 합니다.”

‘‘아 네에~”


그러면 그렇지, 고라니 죽어가는 것까지 불철주야 바쁜 119가 처리하는 건 아니지 하며 나의 미숙한 시민의식을 반성하며 110을 눌렀다.

‘‘네~ 정부 민원 종합 상황실입니다. 어디시죠?”

‘‘네 ㅊ시 ㅇ면입니다”

‘‘제가 그쪽으로 돌려드릴 테니 혹시 통화가 안되면 0xx에 0xxx로 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더 낭랑한 아가씨의 목소리로 연결되었다.

‘‘네 ㅊ시 민원 상황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여기 ㅇ면 ㅂ마을 0번지인데요. 고라니 한 마리가 우리 집 담장 쇠창살 틈에 끼어서 못 빠져나가고 축 늘어져 있어요.”

‘‘아 네~, 먼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축 늘어져 있는데 죽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소관 팀이 달라지거든요. 살아있으면 야생동물 보호과이고 죽었으면 청소과예요. 가까이 가서 확인해 줄 수 없나요?”

‘‘지금 옆에서 보고 있는데 플래시를 비춰도 반응이 없는 거 보니 죽었나 봐요”

‘‘그럼 청소과 소관이네요. 제가 청소과로 연락해 놓겠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 9시 이후에 담당하신 분들이 사체 수거하러 가실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는 너무나 고마운 처방이었다.


어두운 밤중 내내 고라니의 사체가 담장 창살 사이에 죽은 채로 끼어 있을 것이 기괴하고 꺼림칙 하지만, 내가 빼내서 매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고라니의 늘어진 사체에는 잠시나마 측은지심을 가져본 것으로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저어~ 청소과에 얘기를 했는데요, 청소과에서는 로드킬 당한 동물 사체만 수거한답니다. 개인 사유지에서 죽은 동물 사체 수거는 땅 소유주께서 치워야 한답니다.”

친절한 민원실 담당자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베인 전화였다. 다시 고민에 짜증이 배가되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아침이면 길가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기에 흉측할 건데, 내 고라니도 아니고, 내 집에 침입해서 달아나려다 담장에 끼어서 죽었잖아요? 로드킬도 소유권 불명한 짐승 사체 치우는 일 아닙니까? 어떻게 좀 청소과에 잘 얘기해서 처리해 주세요.”

“그럼 고라니를 대용량 쓰레기 봉지에 넣어서 대문밖에 내놓을 수 있나요? 고라니를 청소과에서 수거해 가도록은 해 볼게요.”

이런! 창살에 딱 몸 중앙이 묘하게 끼어있는 사체를 빼내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제일 골치 아픈 처리 포인트였다. 고라니의 사체를 수거해 가도록 청소과를 설득해 보겠다는 것도 민원실 상담원의 전적인 호의임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고라니의 사체 처리 과정의 일부라도 관여하기 싫다는 나의 귀차니즘이 상담원을 물고 늘어지게 했다. 현업의 전성기에 협상의 달인 소리 듣던 몸 아니던가?


“아 고마운 말씀인데, 제가 일단 사체를 만지기 무섭고요, 죽은 고라니 첨 보거든요. 만약에 고라니가 빈사상태에서 가까스로 철창 틈새를 빠져나가서 길가운데서 쭉 뻗어서 죽어 있으면 청소과에서 치우지 않을까요?”

“길 가운데서 죽어 있으면 청소과 소관이겠지요” 상담원의 웃음기 가득한 대답이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렇지요? 지금 고라니가 절반은 길에서 죽은 셈이지 않습니까? 머리는 밖에 있고 뒷다리 엉덩이가 못 빠져나간 것이니 거의 길에서 죽은 셈 치고 청소과에 잘 좀 얘기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참 애매하지만 청소과에 다시 말씀드려 볼 게요”

친절한 상담원이었다. 이 일이 잘 처리되면 당분간은 지방세 내는 거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받았다.

“소관은 아니지만 내일 아침 9시에 청소과 담당자가 댁에 가서 수거해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전화를 끊고 어둠에 잠긴 대문 쪽을 바라보며 의문이 들었다. 누가 쫓지도 않고 무서운 개도 없는 집에서 고라니는 왜 굳이 담장의 좁은 철창 틈새로 나가려고 기를 쓰다 죽었을까?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낮은 담장의 아래쪽 철창에 끼인 것도 참으로 의문스럽지만, 고라니는 끼인 모가지를 빼내기 위한 뒷걸음질은 정말 못하는 것일까?


한때 살아있던 것은 무엇이든 생명이 다하면 땅에 묻어야 하는 상상을 하는 것조차 상당한 마음의 짐이 된다. 살다 보면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 사람마다 식용이 아닌 동물의 사체 크기에 따라 처리에 부담을 느끼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벌레, 곤충의 사체에도 벌벌 떠는 경우도 있겠지만, 보통 남자들은 작은 새, 좀 큰 비둘기 만한 것, 강아지 보다 작은 동물의 사체 처리에는 별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큰 야생 동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동안 날아오다 유리창에 부딪혀 뻣뻣하게 죽어있는 작은 새를 노각나무 둥치 근처에 묻어주며, 그래도 죽어서 땅에 묻힐 수 있는 동물은 복받은셈이라는 생각으로 죄책감을 덜고 위안 삼았다.


유월 하지 무렵 새벽 5시면 훤히 동이 튼다. 잠을 설친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미적거리다 고라니 생각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일어나 대문께로 나가봤다.

눈을 의심했다. 고라니가 사라진 것이다.

마침 대문 앞 과수원 주인장께서 일을 막 시작하다 나를 보고 먼저 인사하신다.

“안녕하시우~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수?”

“안녕하세요~ 고라니가 여기 틈새에 끼어 죽어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없어졌네요?”

“어? 나도 못 봤는데? 근디 고라니 쉽게 안 죽어~ 거 죽었어야 하는데~” 괘씸한 고라니가 안 죽고 도망갔다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분명히 죽은 것 같았는디 참 명이 긴 놈이네요”

“고라니 우습게 보믄 안 되아, 죽은 척 늘어져 있다가 밤새 기운 차려서 내뺐을 거여. 우리 과수원 사과 잎순까지 먹어 치운다니까. 동네에 고라니가 너무 많어~ 엊그제 우리 집 개가 고라니 새끼를 어디서 두 마리나 물어 왔더라니까”

농부 경력이 나보다 스무 배는 많을 분의 말씀이 일리 있었다. 땅이 푹 패인, 몸부림쳤던 현장을 보면서 그래도 녀석이 어떻게든 빠져나간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놈이 새끼까지 쳐서 내 집에 들락날락하면 계속 골칫덩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간 농사에 피해를 끼치는 생명 있는 짐승들에겐 양가(兩價)의 감정이 교차되는 건 웬만큼 자비로운 나도 어쩔 수 없다.


고라니의 숨이 붙어 있었으니 소관과는 청소과가 아니라 야생동물보호과가 되는 것이었는데 내가 본의 아니게 거짓 신고한 셈이 되었다.

어쨌든 고라니 사체? 아니 신체가 사라졌으니 시청 청소과 담당자의 헛걸음은 막아야 해서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민원실로 전화했다. 전화가 자동으로 시청 당직실로 연결되었다.

“시청 당직실입니다. 무슨 일이지요?”

“저어~ 담장에 낀 고라니 사체 처리 민원 신고를 했는데요, 아침에 보니 고라니가 사라지고 없어서 청소과에서 오실 필요 없다고 다시 신고 전화드립니다.”

아침 일찍 전화받고 무슨 긴급한 일인지 긴장했던 당직 직원은 의외로 쉬운 일이어서 인지 푸근한 음성으로 응답했다.

“아 청소과에서 출동할 필요 없다는 거지요? 네 잘 전달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죽었던 고라니는 살아난 것으로 정리가 되었고, 내 고민이었다가 시청 청소과에서 떠맡아준 귀찮은 일도 사라졌고, 우리네 밭은 고라니와 긴장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지만 지금 당장의 마음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아침상을 물리고 독서삼매로 들어서는 중에 전화가 울렸다. 010-xxxxxxx, 모르는 휴대폰 번호였다.

“여보세요~ xx마을 xx호지요?”

“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아 시청 청소과 H라고 합니다. 그 집 고라니 죽었어요! 내가 새벽에 가서 사체 수거해서 처리했지요. 그런데 당직실에서 고라니 사라졌으니 갈 필요 없다고 해서 속상해서 전화하는 거요”

“아~ 그러셨어요? 그런데 민원실에선 9시 이후에 오실 거라고 했는데 이른 새벽에 우리 집에 와서 처리하셨다고요?”

“근처 국도에 긴급 민원이 있어서 새벽에 간 김에 거기 들렀지요. 어제 민원실에서 복상골 한번 가봐 달라고 하도 사정해서 혹시 혼자 사는 꼬부랑 할머니 집에 고라니가 들어와서 죽었나 해서 들렸거든요. 그런데 가보니 대문 안에 승용차도 있고 해서 그냥 가려다가 기왕 간 김에 그 집 고라니 빼 가지고 가져왔지요, 그런데 이제야 시청에서 갈 필요 없다고 연락이 오니 좀 짜증 나는 구만요. 글고 전화받는 분이 남자분이네요?”

느긋한 사투리 억양은 베었지만 표준말로 애를 쓰는 걸걸한 목소리에 주저리주저리 뭔가 불만 있는 말투로 들렸다.

“네 그런데요?”

“남자면 자기 집에 고라니 죽은 거 정도는 알아서 처리하셔야지 뭘 민원실에 신고하고 그래요?”

일단 일은 처리되었으니 고마운 마음이고, 동물 사체 처리 실적에 대한 뭔가 내부적인 평가가 있는 것 같은데 출동 취소 통지로 기분이 상하셨나 싶어서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솔직히 본능적 까칠함도 약간 섞어서) 대답했다.

“어쨌든 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에 수거해 가신 줄 모르고 이른 아침에 보니 고라니가 없어서 헛걸음 안 하시도록 사라졌다고 다시 신고했지요. 제가 기르는 제집 고라니는 아니고요, 보호받는 야생동물은 나라 것인데, 보신 것처럼 절반 이상 길에 나간 채로 죽어서 애매해서 민원실에 부탁했고요, 무엇보다 제가 고라니를 무서워합니다. “

“허허 죽은 고라니가 뭐가 무서워요?”

“죽은 고라니 첨 봤거든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아니요. 암튼 알고 계시라고 전화했구먼요”

“예 감사합니다.”

긴 여름의 초입에 부활의 전설을 만들 뻔했던 고라니는 시청 청소과 직원으로부터 죽었다는 구두 통지를 받고 마침내 죽었다.


고라니의 부음으로 초여름날의 고민거리가 스르르 녹은 듯이 사라졌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삽을 들어 흙을 퍼다가 움푹 파인 곳을 메꾸었다. 그리고 고라니 소동으로 국가 행정의 민생 편의 시스템이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구나 하는 든든한 믿음을 부수적으로 얻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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