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성 산문
“아무래도 극락에 가기는 영 글렀네~”
벌레들의 왕성한 식탐으로 누더기가 되어가는 감자 잎을 뒤적이며 28’점 무당벌레의 통통하고 누런 애벌레 떼를 잡아내다 중얼거렸다. 오월의 뙤약볕이 내려쬐는 초라한 감자 밭두둑은 누가 봐도 밭주인이 초보 농부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력 일천한 수습 농부가 생각할 겨를도, 필요도 없이 본능처럼 무수한 벌레 유충과 생명이 담긴 벌레 알을 없애는 것부터 배워간다. 인도 자이나교 신자들이 보면 나는 불해(不害)의 교리를 일삼아 뭉개고 있는 영락없이 파문당 할 상습 살생자다.
방안에 허락 없이 침입한 귀찮은 파리, 모기를 냉정한 대결과 투쟁 구도 속에서 때려 잡거나 피를 빨리는 기분과는 또 다르다. 이 환한 태양 아래 살생이 무심히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영화 속 막강한 터미네이터처럼 장갑 낀 무지막지한 엄지와 검지에 의한 압살인 일상적 살생에 더하여 가끔은 생화학 무기에 의한 집단 학살과 화염방사기 같은 토치로 불지옥을 구현하는 대량 살생을 저지르기도 한다. 가끔은 나와 하등의 인연도 원한도 없이 사라지는 생명들에 대해, 죄의식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미안한 마음은 머리 한편에 항상 똬리를 틀고 두 손이 하고 있는 짓을 비난하고 거북스럽게 한다.
작물을 무자비하게 갉아대는 벌레를 잡아 죽여야 한다는 생각과 그 불편한 느낌 사이의 갈등은 아마도 살아오면서 이곳저곳의 사찰과 사원 앞을 지나치며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이 은연중에 몸에 베인 탓이리라.
마침 노인회장께서 마을 산책길에 들리셨다. 봄볕이 무서워 밀짚모자에 수건까지 목에 두르고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작물을 들여다보는 신참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기엔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뭘 그리 일일이 잡고 있어~ 감자 잎엔 약을 좀 쳐도 괜찮어~”
“여기 살면서 아무래도 극락에 가기는 글렀어요”
“왜?”
“맨날 이렇게 살생을 해야 하니 말입니다.”
“허허~ 이 사람 아직 모르는 구만, 촌에 살면서 매일매일 벌레를 많이 잡아 죽여줘야 좋은 일하고 천국 가는 거여~ 천국이나 극락이나 비슷할 걸~”
“아이고 회장님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구~ ”
“벌레들은 얼른 죽어서 다음엔 더 폼 나는 것으로 태어나고 싶을 건디 그걸 도와주는 것은 선행이란 말이여. 암~, 다음 생에 좋게 태어나려면 어쨌든 죽어야 되잖어? 자살하면 안 되는디 벌레들은 자살도 못 혀. 어차피 벌레들이 달리 죽을 일도 없거든. 사람 된 도리로 힘닿는 대로 도와줘야지. “
위안도 되면서,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로 자선 선행하는 자부심마저 갖게 하는 지혜로운 격려의 말씀에 마음 한 편의 그 불편함이 사르르 가시었다.
듣고 싶은 말을 들은 자는 득도의 순간으로 착각하며 말씀의 달콤함을 만끽한다.
구슬땀을 닦으면서도 뜨뜻 달달한 커피가 당기는 순간이다.
"회장님 커피나 한잔 하실까요?"
득도 이후 이 모든 게 다 시골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살상선행(殺傷善行)이려니 위안 삼으면서 권위 있는 분의 궤변이 때로는 심약한 대중의 심리 안정에 꽤 쓸모가 있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 불해(不害)와 조력(助力) 사이 심연(深淵)의 간극을 믹스커피 한잔으로 메꾸는 신통한 깨달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