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텃밭을 가꾸는가 물어오면
페렌츠 마테의 산문 ‘토스카나의 지혜’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누가 굳이 ‘마트에 싱싱한 채소가 널렸는데 왜 애써 텃밭을 가꾸는가?’하고 물으면 내가 변명처럼 주저리주저리 얘기할 필요 없이 이 글을 넌지시 보여 주리라.
[ 나(페렌츠)는 파올루치에게 매주 한 번씩 신선한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장이 열리는데 어째서 직접 과일과 채소를 키우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 왔건만 파올루치가 그토록 나를 실망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와인을 길게 한 모금 들이키더니 말했다.
“세상엔 여자들이 넘쳐나지. 애들도 많고. 그런데 왜 다들 굳이 직접 애를 낳고 기르려고 하는 건가?”]
텃밭의 채소는 재배하느라 들인 비용보다 시장에서 사다 먹는 것이 더 쌀 때가 왕왕 있다. 나의 노동력의 대가를 최저 임금의 절반도 안되게 셈한다 해도 그렇다는 얘기다. 대규모로 짓는 계절 작물은 농사 작기(作期)가 정해져 있다. 제때의 농작물이 대량으로 수확되어 시장에 나오는 제철이면 손수 기른 것보다 때깔도 좋고 값도 싸서 가격표를 보는 순간 '베짱이가 부러운 억울한 개미'의 심정이 된다. 선크림을 바르고도 햇볕에 얼굴 타가며 밭이랑에 쏟은 시간이 슬며시 아까운 생각에 심통도 사나워져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한다.
‘내년엔 감자는 안 심을 거여!‘
이 심통 블랙리스트에 올려본 걸 꼽아보면 감자, 고구마, 옥수수, 대파, 마늘, 양파, 배추 등등인데 심통의 블랙리스트의 효력은 길어봐야 반년이니 해가 바뀌면 까맣게 잊고 또 심고 뿌린다. 일상 식탁의 단골 샐러드감 채소는 언제나 환영 목록에 올리긴 하지만 영지 안의 두입만 생각하면 그것들 마저도 사다 먹는 게 싸다. 그래도 상추, 루꼴라, 치커리, 고추, 토마토, 오이, 가지 등등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채소에는 가성비를 따지고 싶지 않고 텃밭을 내려다보면 그저 흐뭇하다.
비용의 불합리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채소를 가꾸어 먹는 이유는 뭘까? 답하는 사람마다 실로 다양한 의견이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럼 나에게 묻는다면?
우선 텃밭을 가꿀 땅이 있다는 것에 더해 시골에서 살면서 일상의 채소를 사다 먹는다는 것에 대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마음속 저항과 부담이 일차적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라면 이유이다. 눈앞의 텃밭에서 자라는 것을 매일 두 손으로 걷어서 가져다 먹으니 매일매일 식생활에 한 푼의 돈도 안 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텃밭에 쏟은 나의 노동력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기도 하지만, 만원 지폐 한 장도 시골의 만원은 서울에서의 만원보다 훨씬 크다는 상대성도 작용한다.
그다음은 정해진 레퍼토리 같지만. 푸성귀와 땅속줄기채소를 직접 재배하는 수고를 하는 이유로 농약 즉, 제초제(herbicide)와 살충제(pesticide)의 해독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퇴비를 만들어 흙에 섞어 재배한 건강한 먹거리를 가족과 함께 먹는다는 만족감에 더해 그것들을 대지에 독을 뿌리는 죄업 없이 가꾸어 먹는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텃밭 가꾸는 세 번째 이유로는, 텃밭에서 바로 따온 것들은 다 맛있다는 자랑을 들고 싶다. 실제로 땅에서 막 캐거나 줄기에서 뚝 따온 것은 과일이든 채소든 다 맛있다. 생산지에서 소비처까지 몇 걸음 거리라는 매력을 어찌 손꼽지 않으리오.
앞의 환경보호나 경제적인 이유나 최상의 맛에 우선해서 내게 텃밭을 가꾸는 네 번째 이유이자 계속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라면, 해보면 ‘은근히 재미있다’는 점이다. 씨앗을 심는 것부터 꽃피고 다시 무수한 씨앗을 맺는 것까지 들여다보는 재미, 싱싱한 식재료를 땅에서 부엌으로 직송하는 재미는 해본 이들만 느낄 수 있는 도락이다. 차려낸 식탁 위의 접시를 보며, 이것도, 또 이것도 다 우리 밭에서 나온 거야 하며 식사공동체로서의 동지 의식을 느끼며 먹는 재미도 추가한다.
부수적이지만, 나눠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나눠주는 재미라는 것은 좀 미묘하긴 하다. 일단 나눠줄 수확물의 잉여의 크기와 수확한 것의 모양새가 나눠줘도 될만한지, 수확에 따르는 수고, 받는 상대방의 반기는 정도에 따라 재미의 영속성이 좌우되는 것을 보다 보면 나눔 재미가 텃밭 가꾸는 주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 같고 그냥 베푸는 생활의 재미 정도이다.
텃밭을 가꾸면서 생기는 바람직한 신체와 오감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입이 소박해져서 제철에 맞는 채소와 과일을 즐기는 것으로 몸이 만족하게 된 것이다. 어느 과채(果菜)든지 그것이 시장에 나오는 제 철에 맛있게 즐기고 제 철이 지나면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그 맛을 기억한다. 그것이 마음 설레면서 계절을 기다리는 전원생활자의 일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늘의 움직임은 건강하고 계절은 변함없이 오고 간다. 굳이 산천이 얼어붙고 눈이 펑펑 내릴 때 비닐하우스에서 불을 때 가며 재배하는 딸기나 수박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나아가 제 철이 아닌 먹거리는 부자연스럽게 보이게 된 것이다.
때깔 좋은 과일 채소만 찾다가 이젠 벌레 먹은 채소 과일도 별 거부감 없이 맛있게 먹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벌레나 달팽이가 맛나게 드시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리라.
텃밭의 적당한 크기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는 텃밭을 논할 때 단골 주제이다.
나를 전원생활 선배로서 간주하고 친구들이 물어본다. 반문하며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면 텃밭 채소를 가꾸어 본 경력에 따라 적정 크기는 팍팍 줄어든다.
텃밭 경작 경험이 없는 친구들은 한 오십 평? 정도로 부른다. 너무 작게 불렀나? 약간 주저하면서.
한 이삼 년 경작해 본 친구는, 바로 반박한다. “오십 평은 농사여, 텃밭은 이십 평이면 족해”
한 오 년 경작하다 이제는 손을 뗀 노숙한 농부전력을 가진 친구는 점잖게 충고한다.
“어이구 이십 평도 커. 삽과 호미로만 지을 수 있는 크기여야 해”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
“맞아, 대여섯 평 정도여도 한 가족 입에는 충분해.”
잡초 농사를 지을 생각이 아니라면 땅뙈기가 쓸데없이 넓을 필요는 없다. 가물 때 물 주는 것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