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꽃잎이 질 때
지구 반대편 더운 곳의 바닷가 공사 현장에서, 정원을 새롭게 가꾸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별 감흥 없이 ‘고생했어요’ 하고 잊고 있었다. 아내 홀로 호미로 꽃밭을 만들고 뭔가 이런 꽃 저런 씨앗을 뿌리고 심었다는 얘기도 있었던 것 같다.
새벽부터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묻혀 하루하루 공사 날짜 지나가는 것에만 미시적으로 초조 해 하던 어느 날, 분홍빛에 간간히 붉은색이 베인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무더기로 피어난 꽃대가 울타리처럼 늘어선 사진 한 장이 날아들었다. 반가움에 자세히 보니 꽃대를 따라 줄줄이 피어나는 꽃송이 무게에 꽃대가 꺾여 넘어질 것을 염려해서 끈으로 꽃대들을 서로 얽어서 묶어 놓았다.
그때만 해도 손바닥 만한 분홍빛 큰 꽃이 꽃대를 따라 줄줄이 피어난 이 꽃이 무엇인지 몰랐다. 화사하고 환상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 꽃을 피워낸 아내의 정성에 찬사를 보냈다.
알아보니 글라디올러스였다.
때가 되어 현직의 짐을 벗었다. 시골 영지의 거처에서 비로소 머슴 모드로 변신하여 한 해의 온 계절을 온전히 살아보니 정원과 길가에 피어나는 꽃들이 저절로 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혹독한 겨울바람을 견디고 땅이 풀리면서 일어나는 영지의 변화는 겨우내 더 게을러진 영주의 일상도 머슴의 하루도 자연스레 바꾸어 준다. 봄날의 시간 배분을 통해 나 자신의 정체성을 나눈다. 대강 전원의 개똥철학자, 기술적 사색가 그리고 취미 사진가로 적당히 삼분한다. 엉뚱한 호기심에 일을 하고, 할 일을 생각하다 멍 때리는데 일가견이 있고, 카메라를 들고 바라보고 들여다본다는 의미다.
복상골에 들어앉아 봄여름가을을 즐기고 겨울을 맞이할 때면 다음 해를 위해 봄보다는 훨씬 덜 게으르게 움직여야 한다. 제철에 화려하게 꽃송이를 보여주던 앙상한 겨울나무들을 둘러보고 가지를 쳐주고, 분홍 꽃 글라디올러스 구근을 정성스레 캐내고, 보온용 두꺼운 부직포로 작약 뿌리를 덮어주며 봄날에 다시 피어날 꽃을 떠올렸다. 정원을 가꾸는 누구나가 하는 것처럼 수년간 제법 묵묵히 싸매 주고 구근을 캐내고 봄이면 다시 심는 일을 하던 대로 해왔다.
늦가을이면 쌀쌀한 바람을 맞아가며 구근을 캐내고 싸주고 매주는 작업을 하면서 매년 이렇게 해야 하나 생각 끝에 작은 성의 영주로서 결단의 칙령을 내렸다.
‘내 영지 안의 정원에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칙을 적용하겠노라’고.
그해 가을 글라디올러스 구근을 캐내어 창고에 얼지 않게 보관해야 한다고 채근하던 아내에게, 해마다 가을에 캐내고 봄에 다시 땅에 심어야 한다면 그 꽃은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게으른 영주의 궤변적 결단으로 글라디올러스도 적자생존의 시험 목록에 추가되었다.
늦가을이면 거의 한나절 품을 팔아 보온재로 둘러싸주던 배롱나무도, 노랗고 빨간 꽃을 선사하던 사계 장미도 그해 겨울을 스스로 견뎌야 했다. 살아남아 피우는 꽃들에 감격하고 좋아하겠지만 내심 두렵기는 했다.
아내가 아끼는 글라디올러스 구근이 얼어붙어오는 땅속에서 게으른 나를 원망하며 얼어버린다면… 후회가 있었지만, 길게 보고 결심했고 이미 땅이 꽁꽁 얼어서 다시 캐낼 수도 없었다.
봄날 글라디올러스 순이 올라와야 할 때, 기다려도 기미가 없다면 봄부터 여름 내내 아내의 구박을 나는 뻔뻔하게 견딜 수밖에 없다.
그다음 해,
수선화를 선두로 백합, 작약에 작은 무스카리까지 씩씩하게 싹을 내밀고 의젓하게 꽃을 피웠다. 그런데 봄이 다 가도록 그 분홍색 꽃을 피워내던 글라디올러스 싹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배롱나무도 줄기가 매끄러운 고목(枯木)이 되었다. 게으른 정원사를 만난 불운을 어찌하랴. 아무래도 지구 위도상 우리 정원의 적자(嫡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캐내지 않고도 거적이라도 덮어주었으면 얼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지나가는 어떤 이의 전문가적 지적이 아내의 구박에 힘을 보탰다. 여전히 적자생존의 기치를 내세우지만 내심 아쉽고 아깝다. 지난날의 화려했던 시절의 글라디올러스 큰 꽃이 사진으로 남았다.
꽃 이파리가 작은 나무 꽃은 눈발 같은 꽃잎이 흩어져 휘날린다. 벚꽃이 그렇고 살구꽃이 그렇다. 봄바람에 작은 꽃잎이 바람에 날려 혹은 분분히 떨어지는 광경은 보는 이들에게 서늘하면서도 로맨틱한 기분이 들게 한다.
풀꽃은 꽃잎이 꽃대에 붙은 채로 시들어 씨앗을 맺는다. 그러다 그대로 계절과 함께 사그라진다.
꽃잎이 큰 나무 꽃은 대체로 뚝뚝 떨어진다. 큰 꽃은 그 크기만큼의 중력으로 그대로 떨어진다. 꽃잎이 낱장으로 날리며 떨어지다가도 종국에는 시들어가는 꽃송이가 약한 바람에도 수직 낙하한다. 바람을 느낄 새도 없이.
긴 시간을 기다려 핀 꽃잎이 클수록 너무나 잠깐 피었다 진다. 큰 꽃이 시들다 스러져가는 처연한 모습은 자연의 순리(順理)지만 별리(別離)의 슬픔을 보여주는 미학적 순간이다. 목련 꽃은 한 장 한 장, 작약꽃은 굵은 씨앗을 남기고 변색된 꽃잎으로 땅을 덮는다. 머슴은 그냥 치우고 싶고 시인은 그저 그냥 두고 싶다.
진 꽃이 인상 깊은 슬픈 꽃, 기억 속의 슬픈 꽃은 시들기 전 싱싱했던 그대로 쌓인 눈 위로 뚝 떨어져 놓인 붉은 동백꽃이다. 나무에 피어있던 그대로 눈 속에서 다시 핀 듯 놓여있는 동백꽃이 왜 슬퍼 보일까? 살아있던 것이 살아있는 듯이 그대로 진다면 진정 슬플 일이다.
자연의 시간이 다하여 씨를 맺고 시들어 사라지는 것은 무언가 소임을 다하고 떠나가는 것을 배웅하는 것처럼 아쉽지만 슬프지는 않다. 그런데, 화려했던 아우라가 걷히며 글라디올러스가 시들 때의 모습은 아쉬움을 넘어 애처롭다. 글라디올러스는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지 않아서 더 애처롭다. 큰 꽃이 줄줄이 말라붙은 꽃대가 꺾여 비 내린 젖은 땅에 누워 있으면 누가 보아도 애잔하다. 그래서 초본(草本) 큰 꽃은 시들 때쯤이면 미련 없이 잘라 주어야 하는가 보다. 절정으로 빛날 때를 기억하도록.
인도의 어느 시에 머무를 때, 석양의 산책길에 큰 나무에서 떨어진 붉은 꽃들이 불가사리처럼 길바닥에 널려 있었다. 애써 밟지 않으려 바닥만 보며 피해 걷다가 불가사리 한 마리가 어깨 위로 툭 떨어질 때 둔탁한 타격과 소리에 깜짝 놀랐다. 큰 꽃이 떨어지면 무섭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