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서 보게 된 꽃
말복이 지나고 더위가 한풀 꺾인 처서(處暑) 무렵 무씨를 뿌렸다. 늦가을 11월 하순에 적당히 자란 무로 동치미를 담았다. 크기가 자잘한 무는 뽑지 않고 밭에 그대로 두었다. (잘 자라지 않은 것도, 자잘하다고 뽑지 않고 그대로 둔 것도 다 게으른 그 집 머슴의 태만 탓이었다.)
눈이 내리고 비가 오더니 봄이 왔다. 겨우내 텅 비어 허전하던 땅에 여기저기 부지런히 피어난 푸릇푸릇한 잡초가 시동을 거는 듯 계절에 탄력을 주던 이른 4월, 무심히 잊고 있는 중에 무를 심었던 밭 여기저기서 잡초 사이로 꽃대가 쑥쑥 솟아올라 처음 보는 꽃을 피웠다. 아내는 그 꽃을 잘라 온실 화병에 꽂았다. 꽃잎 가장자리를 연보라색으로 물들인 몽환적인 무 꽃을 눈 가까이 들여다보며 연신 감탄했다.
연초록 꽃대위에 피어난 흰색에 보라색이 스민 작은 꽃잎마다 가느다란 잎맥이 투명한 핏줄처럼 퍼져 있다. 가냘프면서도 생명이 살아있는 숨결이 느껴져 시들기 전에 사진으로 남겼다.
초보 농부가 무 꽃에 매료되니 그 해 채소밭에 심은 여러 채소류를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울 때까지 시험 삼아 그대로 두었다. 종자를 받으려는 것도 아니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봄바람에 흔들리며 꽃대를 내밀고 피어난 채소 꽃의 청초하고 수수한 모습이다.
루꼴라도 가는 꽃대를 내밀고 하얀 꽃을 피운다. 배추도, 겨자채도 때가 되면 꽃대가 올라오고 유채꽃 닮은 노란 꽃이 어느 날 피어 있다. 씨앗으로 싹이 튼 채소에 때가 되면 꽃이 피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이치인데 채소가 꽃을 피운다는 것이 왜 이리 신선한가!
노란 상추 꽃, 노란 중심에 가장자리가 하얀 쑥갓 꽃 (꽃말도 이쁘다. 상큼한 사랑이란다), 보라색 치커리 꽃도 본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내내 우리에게 푸른 잎을 내어주고 여름이 절정에 닿기 전에 피워내는 여러 채소 꽃들, 땅속에 알뿌리 굵어간다 알려주는 감자꽃, 고구마꽃, 가을 파란 하늘 배경 삼아 높이 솟아 흔들리며 누군가의 눈을 유혹하는 노란 뚱딴지꽃…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밭 주변에 흔하게 보이는 작은 풀꽃마저 가까이에서 한참 들여다보면 새롭게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허전한 텃밭에서 먼저 피어나는 꽃이어서일까? 여러 채소 꽃 중에서도 이른 봄날의 무 꽃을 바라보는 것은 사뭇 다른 느낌이다.
가꾸는 자가 심히 게으르지 않으면 보기가 어렵기도 한 데다 그 몽환적인 색감이 단연 으뜸이다. 그래선지 채소가 피운 꽃 중에 나에게는 무 꽃이 제일이다.
꽃을 피우고 벌나비를 불러와야 열매를 맺는 가지, 오이, 호박과 달리 잎을 먹는 채소인 상추, 쑥갓의 꽃을 보기까지 텃밭 농부의 인내에 더해서 필요한 것은 남다른 게으름이다. 꽃이 피기까지 잎이 뜯긴 자국이 층층이 남아 초여름 도깨비가 꽂아둔 몽둥이 같은 굳은 줄기 대를 텃밭에 그대로 두고 지켜보는 것은 무던한 게으름의 미학이라 할만하다.
종자를 얻으려는 목적 없이 단순히 꽃을 보려고 배추나 무 같은 십자화과 채소를 재배하는 게으른 멍청이가 있을까? 하는 다소 의기양양한 자찬을 하면서, 아마도 초보 농부의 허튼짓에도 너그러운 마을마다 한두 명은 꼭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텃밭 초보라면 누구라도 우연히 무 꽃을 보면 반하고 말 것이니.
뱀다리: 대단한 발명 중에는 우연한 실수에서 나온 것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소박하게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지도 않게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게으름이 기막힌 아름다운 것을 우연한 선물처럼 보여준 것에 감사한다. 세상에! 게으름에 감사하다니.